세상의 시간, 세상의 풍경 | 허우 샤오시엔 이야기

「밀레니엄 맘보」가 메워질 수 없는 고독과 그리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가 닫혀버린 비키와 하오하오의 세대, 그 대책 없는 세대에 대한 장형(長兄)의 책임과 부끄러움, 근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보며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십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2015년에 무협의 형식으로 도착한 「자객 섭은낭」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한 장면 한 장면이 최선이었다.

2015-12-04     정홍수

마음은 바빴지만, 정작 네편밖에 보지 못했다. 어수선한 생업에 쫓겨 극장으로 달려갈 시간을 많이는 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에 대한 온당한 대접이자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영화는 언제든 삶과 생활이 먼저다. 고달프고 막막하지만 누구든 담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시간이 그의 영화에는 흐르고 또 흐른다.

영화 속 시간을 함께 살아내게 하는 감독

12년 전 감독의 전작전을 보았던 바로 그 극장에서 「펑쿠이에서 온 소년」(1983)을 다시 보았다. 펑쿠이라는 작은 섬에서 대만 남부의 큰 항구도시 가오슝으로 무작정 건너온 소년들. 7,80년대 시골에서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던 우리의 모습이 거기 있다. 조금 널찍하긴 해도 구로공단 닭장집 같은 곳에 방을 구하고 도회지 생활을 시작한다. 누구는 공장으로 가고, 또 누구는 시장 행상으로 나선다. 주인공 아칭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 옆방의 샤오싱은 갑자기 타이페이로 떠난다. 거기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그녀는 아칭에게 도장을 주며 이번달 월급을 대신 받아달라고 말한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 부쳐달라고. 그녀는 배를 타러 떠난 황진허의 연인이긴 해도 아칭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잔인한 부탁이란 도대체 무언가. 그런데 왜 이 장면이 내 기억에서는 지워졌을까. 나는 영화를 처음 보는 것처럼 몸을 숙여야 했다. 인파 속 가오슝 터미널에 멍하게 홀로 서 있는 아칭을 영화는 오래 묵묵히 보여준다. 샤오싱을 태운 버스는 떠나고, 아칭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아름다운

아마도 '멍청한 무지'는 끝끝내 남을 것이다. 「비정성시」(1989)의 그 둥글고 큰 식탁은 가혹한 대만의 역사 속에서 하나둘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빈자리를 더하고, 「비정성시」(1986)의 소년은 끝끝내 바닥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남국재견」(1996)의 두대의 오토바이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리듬으로 산등성을 오르겠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이 탄 차는 논두렁에 처박힐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2001)의 신주꾸 철로변 여관에서 비키는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며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가 메워질 수 없는 고독과 그리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가 닫혀버린 비키와 하오하오의 세대, 그 대책 없는 세대에 대한 장형(長兄)의 책임과 부끄러움, 근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보며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십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2015년에 무협의 형식으로 도착한 「자객 섭은낭」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한 장면 한 장면이 최선이었다. 감독은 왜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를 벌판의 집 한켠에 있는 염소들 쪽으로 향한 것일까. 그 염소들의 눈을 잊을 수 없다. 대륙에서 찍었다는 자연, 그 아름다운 산하의 풍광들은 감독이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겪은 아버지 세대에 바치는 헌사였던 것일까. 그러면서 그 산과 벌판, 하늘과 초목은 「연연풍진」과 「비정성시」의 그곳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하나하나 다시 보고 싶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