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 어느 HIV/AIDS 감염인의 이야기

동성애자들의 저 가없는 자긍과 자기확신과 시대의 물결 앞에, 감염인들이 설 자리는 왠지 적어 보입니다. 그들의 자리가 협소해 보이는 까닭은, 그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아니 그들이 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조차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는 이유는 감염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병증을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겠고,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감염인들이 그런 주체 없는 책임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때,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고는 하였습니다. HIV/AIDS 감염인의 죽음 중 상당수는 가족이 배석하지 않고, 빈소가 꾸려지지 않고, 장례식이 치러지지 않는 식으로 수습됩니다.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셈입니다.

2015-12-01     터울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다름 아닌 '동성애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뭣도 모르는 이성애자들 주위에 동성애자가 없었을 리가 없겠지요. 다만 도저히 입을 떼기 어려운 어떤 아우라 앞에 자신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일 겁니다.

"1992-3년도지. (중략) '형 술집 오지 마라.' '왜?' 그러니까 쟤가 간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라는 거야. 길녀 얘기했잖아 내가. 길녀가 왔다 가니까 오호, 소독약을 뿌리고 난리를 치더라고. '왜 그러는데?' 그랬더니 '저년이 에이즈 환자야.'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걔 먹는 거 다 버리고 유한락스로 닦고 난리를 치는 거야. 그런데 걔가 뭐라고 하냐면 '형이 왔다가도 저래.' 그러는 거야. 그걸 내가 봤잖아. 내가 그때부터 국내 술집을 안 가는 거지."

, 2013, 45-46쪽.

동성애와 HIV/AIDS

그래서 초창기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이 AIDS란 질병을 동성애라는 성정체성과 떼놓으려는 노력을 진행했습니다. AIDS가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도 감염될 수 있고, 문제는 동성애나 항문섹스가 아니라 콘돔을 쓰지 않고 체액이 오가는 섹스 관습 때문임을 줄기차게 외치고 홍보했습니다. 동성애자에게 AIDS는 결코 필연이 될 수 없으며, 저런 질병을 스스로 예방하는 것이 게이로서의 자신을 승인하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전기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말씀대로, 이론상 동성애와 AIDS는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임이 확실했고, 괴롭도록 굳건한 사람들의 선입견 아래서도 당연한 것을 당연한 제자리로 돌려놓는 노력은,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 AIDS와 동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정리를 뿌리박기 시작했습니다.

▲ <친구사이 20년사> 발간기념회 전시물 中(2014.9.20).

묘비명 없는 죽음

그렇다면 HIV/AIDS는 어떨까요. "감염인과 환자들의 인권과 치료권을 확보하기 위한"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가 2004년 2월 발족 이래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고, 그 사이 윤가브리엘님, 노랑사님 등 본인이 감염인임을 커밍아웃한 활동가분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HIV/AIDS 문제는 아직도 무언가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저 가없는 자긍과 자기확신과 시대의 물결 앞에, 감염인들이 설 자리는 왠지 적어 보입니다.

HIV/AIDS 감염인의 죽음 중 상당수는 가족이 배석하지 않고, 빈소가 꾸려지지 않고, 장례식이 치러지지 않는 식으로 수습됩니다.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 그들이, HIV/AIDS와 개념적으로 혼동되던 지난날을 극복하고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동성애자들 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먼저 떠나가는 것

이 유고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말한다면, 글쓴이는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끝까지 낯설어하고, 종내엔 그로부터 먼저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사람'들이 감염인들을 얼마나 노골적이고 교묘히 밀쳐낼 수 있는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감염인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무섭도록 변하지 않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희망인지를 아는 그들은, 끝내 세상에 대한 기대치를 제 손으로 거두어갑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차라리 먼저 작별을 준비하고 관계를 끊습니다. 그쯤 되면 구태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눈에 뻔히 보이는 외부의 압력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 모두와 아예 차라리 앞서 끊어지고픈 까닭으로, 그들은 거듭 세상 속에서 지워집니다.

'현재'라는 신비

그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에이즈 환자"의 몫 또한 그렇게 나아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요? HIV/AIDS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지금보다 널리 보급되고, 바이러스와 합병증에 대한 더 나은 치료약이 개발되고, 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를 사회의 낙인이 점차 우스운 것이 되고,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체계적으로 접어야 했던 감염인들이, 그들의 삶 안에서 세상에 대한 기대를 다시 찾게 되는 날이, 기여코 오리라고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감염인들이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을 밝히는 것이 더는 부끄럽지 않고, 커뮤니티 안에서 AIDS를 웃고 떠들어도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그런 세상을, 지금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몇년 전의 동성애자들 또한, 오늘과 같은 세상을 쉽게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은 때로 몇몇 눈밝은 이들의 분투에는 꿈쩍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변해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오늘과 다른 과거가 이제 와선 낯설어 보이듯이, 누군가의 현재는 결국 후에 낯선 것이 되고 맙니다. 한 감염인 게이가 온몸으로 써내려간 희망과 절망의 노둣돌 앞에, 어느 때보다 쾌조를 보이는 것 같은 이 땅의 동성애자 커뮤니티들이, 지금의 현재가 어째서 신비일 수 있고, 자신들의 과거에 비추어 누군가의 현재가 어째서 문제적인지 살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보다 세련되고 자꾸만 높아지고 싶고 이제는 발밑을 보지 않아도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 전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과 너무도 유사하게 속을 태우던 감염인들에게 한번쯤 손 내밀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감염인과 비감염인이 '같이 살' 수 있는, 그럼으로써 저마다 진정으로 존엄해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죄를 얼마나 더 용서받아야 마땅할지에 대해, 아직 조금은 더 함께 나눌 말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

끝으로 서른 셋을 일기로 영면하신 故 오준수님 또한, 그분의 노고에 값하는 평화와 안식을 얻으셨기를 이 글을 빌어 간절히 소망합니다.

친구사이 담론팀 2차 기획토론(2015.3.31.) 기사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친구사이 소식지 55호(2015.1.29.)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