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 고담의 전설과 공포스런 동요들

2006년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204~206호에 연재된 '고담의 광인들'이라는 스토리 아크에서 작가인 저스틴 그레이는 고담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전설에 나오는 고담은 브루스 웨인의 조상이 미국에 건설한 가공의 대도시 고담이 아닌, 영국 노팅엄셔 주에 실재하는 마을이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로빈 후드가 셔우드 숲의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의적단을 결성하고 부자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던 13세기 영국.

2015-11-16     이규원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8]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 고담의 전설과 공포스런 동요들

광인의 도시 고담

영국 민담을 고담의 기원과 연결지은 「고담의 광인들」 에피소드가 실린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204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04?file=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04.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때는 시간을 거슬러 로빈 후드가 셔우드 숲의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의적단을 결성하고 부자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던 13세기 영국. 로빈 후드는 처음부터 무작정 의적질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 백성들은 셔우드 숲과 같은 넓은 숲을 삶의 근거지로 살았는데, 탐욕스러운 존 왕이 숲을 왕실 소유로 귀속시키면서 백성들의 출입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졸지에 먹고 살 터전을 잃어버리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셔우드 숲 사람들은 로빈 후드를 중심으로 의적단을 결성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혼내는 일을 시작한다.

훗날 이 전설을 바탕으로 '고담의 세 현인(賢人)'이라는 동요가 만들어지는데,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고담의 세 현인이 사발 속의 바다로 들어간다네, 사발이 더 튼튼했더라면 내 이야기가 더 길어졌을 텐데.' 2000년 출판된 『아캄의 배트맨』에서는 조커가 실제 이 이야기가 기록된 책인 『고담의 광인들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라는 책을 펼쳐 들고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등장한다.

살육의 늪과 솔로몬 그런디

영국의 전래 동요에서 모티브를 얻은 DC코믹스의 언데드 슈퍼 빌런, 솔로몬 그런디

(사진 제공: 세미콜론)

또 다른 버전은 그랜트 모리슨의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에 등장한다. 수전노 사이러스 골드가 소아성애자로 아이들을 납치해 살육의 늪으로 끌고 온 다음 못된 짓을 하고는 죽여서 늪에 버렸다는 소문이 퍼진다. 분노한 군중은 그를 잡아다 패 죽이고는 살육의 늪에 던져 버린다. 중간적인 장소인 살육의 늪에서 사이러스 골드가 진짜 소아성애자였는지, 아니면 군중 재판의 억울한 희생자였는지, 과연 솔로몬 그런디가 사이러스 골드의 환생인지에 대해서는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의 결말까지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미지의 힘.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비밀 조직, 올빼미 법정의 존재를 암시하는 고담의 전래 동요.

(사진 제공: 세미콜론)

지금부터는 작가들이 만들어 낸 고담의 전설과 노래를 들어 보자. 위 내용은 『배트맨: 올빼미 법정』과 『배트맨: 올빼미 도시』에 나오는 동요로,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고담에 전해지는 노래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한낱 전래 동요쯤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이것은 은밀하게 고담을 지배하는 비밀 조직 올빼미 법정의 노래다.

십 대들의 장난을 통해 고담에 소환된 초자연적 존재, 미드나잇 맨과 배트걸의 대결을 그린《배트걸》 30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girl_Vol_4_30?file=Batgirl_Vol_4_30.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 오싹한 노래는 고담의 학생들이 즐기는 공포 게임 '미드나잇맨'의 노래다. 우리 나라 식으로 하면 분신사바같이 귀신을 부르는 의식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2014년 《배트걸》 30호에서는 고담의 학생들이 재미삼아 이 의식을 하다가 초자연적인 존재인 미드나잇맨을 세상에 불러내고, 근처에 있는 배트걸이 그들을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이 노래를 소개한다.

고담 시의 새로운 영웅? 악당?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Simon_Dark_Vol_1?file=Simon_Dark_Vol_1_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 노래는 고담 시의 소녀들이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전래 동요는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동네 아이들이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래의 주인공인 사이먼 다크는 고담 시에서 활동하는 한 무법자의 이름으로,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만화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의 원작자 스티브 나일즈가 2007년에 DC의 《사이먼 다크》라는 새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창작한 캐릭터다. 사이먼은 자신이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전혀 모른다. 태어난 기억도 없고, 자란 기억도 없는 그는 얼굴에 하얀 가면을 쓰고 있고, 어둠 속에서 살며, 에드거 앨런 포의 『미스터리와 상상의 이야기』를 읽는다. 가면 아래에는 17~18세 소년의 얼굴이 있고, 몸은 여러 시신에서 떼어다 붙인 듯 꿰맨 자국이 가득한데,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며 뛰어난 몸놀림과 살인 기술을 지니고 있다. 아마 배트맨이 이런 존재를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려 했겠지만 《사이먼 다크》 시리즈 전체 18 이슈 동안 사이먼의 고담 시에는 배트맨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트맨과는 전혀 다른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고담 시를 만끽하고 싶은 팬들에겐 신선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