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때문에 비행기도 못 뜨는 나라, 비정상 아닌가

일 년에 단 한 번의 기회로 누군가의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오만하고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다.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 혹은 옳지도 않다는 것은 이 과정을 거쳐온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음직한 의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이 사회를 위해 입시제도, 더 나아가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일단 내 자식 시험본 후'를 말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는가.

2015-11-13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연합뉴스

글 | 심나리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

필자가 언론사 기자였던 2006년 11월 수능날 아침, 배화여고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록을 남겼었다.

예전처럼 교문에 덕지덕지 엿이 붙어 있던 진풍경이나 교문을 붙들고 통곡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를 했던 한 어머니는 자식이 '반수'를 했는데 '본래 혼자 잘 하는 애라서 신경을 덜 썼는데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수능의 기능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12년간 받은 교육의 모든 것을 단 하루 시험에 탈탈 털어넣고, 그 결과에 따라 줄을 서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요즘 같은 저성장 침체기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도 직장선택과 결혼에서 별다른 혜택을 보기 어렵다는 걸 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대학 -> 더 많은 기회 -> 나은 직장 -> 결혼과 안정된 삶'이라는 공식은 여전히 우리 머리에 박혀 있다.

일 년에 단 한 번의 기회로 누군가의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오만하고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다.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 혹은 옳지도 않다는 것은 이 과정을 거쳐온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음직한 의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어떤 부모들은 자식들을 '스터디룸 가구'에 가두고 자정에 가깝도록 학원 뺑뺑이를 돌린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전능해보이는 레토릭은 멈추지 않는다.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냉정히 물어봐야 한다.

지난해 1,450명의 20세 이하 청소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통계청은 밝혔다. 성적비관과 우울증이 자살 원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서 매년 한 두명이 성적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했고, 상당수 학생들은 이로 인해 큰 충격에 빠졌었다. 자신과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날 이 세상을 등졌을 때,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치유가 되고 있기는 한걸까. 당사자가 내 자식이 아닐꺼라는 보장은 있는 것인가. '경쟁자가 한 명 없어져서 뒤로 웃었다'는 말은 그저 헛된 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에도 수능 성적 발표를 전후로 또 이런 뉴스들이 신문 한 켠에 실릴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필자는 2027년 11월 어느 학교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자식이 공부를 최고의 선(善)이라 생각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모로서의 삶이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이 환경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문제가 아니더라도, 2015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가.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