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근사한 패션 테러리스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워스트 드레서는 따로 있다. 바로 빌 머리다. 그의 취향은 기발한 지경을 넘어서서 종종 괴팍하기까지 한데, 특유의 시큰둥한 캐릭터와 과감한 시도가 충돌하는 광경이 은근히 재미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이 배우는 알록달록한 우산이 달린 모자를 쓴 채 골프를 치곤 한다. 올해 초에는 핑크색 드레스에 카우보이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텔레비전 토크쇼에 등장했다. 그는 패션 금기를 종류별로 섭렵하는 일종의 스타일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2015-11-05     정준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평상복도 충분히 끔찍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워스트 드레서는 따로 있다. 바로 빌 머리다. 그의 취향은 기발한 지경을 넘어서서 종종 괴팍하기까지 한데, 특유의 시큰둥한 캐릭터와 과감한 시도가 충돌하는 광경이 은근히 재미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이 배우는 알록달록한 우산이 달린 모자를 쓴 채 골프를 치곤 한다. 올해 초에는 핑크색 드레스에 카우보이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텔레비전 토크쇼에 등장했다. 2012년에 <문라이즈 킹덤>으로 칸 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당시 공식 포토콜에서 선보인 의상도 기억에 남는다. 파스텔 톤의 체크무늬가 프린트된 잠옷 같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또 요란한 패치워크 체크무늬의 재킷을 걸친 모습이었다. 그는 패션 금기를 종류별로 섭렵하는 일종의 스타일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당신이 빌 머리가 아니라면 절대 빌 머리처럼 입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빌 머리 본인만큼은 뭘 입더라도 왠지 수긍이 간다. 이 배우는 안전한 선택만 하는 지루한 베스트 드레서들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워스트 드레서다.

에서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패션 테러를 저질렀다. 샬롯(스칼릿 조핸슨)과 도쿄의 밤거리로 나서기 전, 밥(빌 머리)은 온갖 원색이 뒤섞인 카무플라주 프린트의 티셔츠를 고른다. "중년의 위기 같아요." 새로운 친구가 웃으며 면박을 주자 그는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옷을 뒤집어 입은 뒤, 가위로 목 부분의 태그를 잘라낸다. 아니면 말고 안 되면 뒤집는 그 시큰둥한 태도에는, 셔츠의 구겨진 정도나 바지의 밑단 상태가 하루의 기분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건인 패셔니스타들은 결코 따라잡지 못할 세련됨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주 금요일 밤 파티에 뽀로로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 나가라고 독자들을 부추기고 싶진 않다. 빌 머리처럼 입고도 근사해 보일 수 있는 건 빌 머리뿐이니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