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을 읽는 시간

"우리는 어차피 다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 어쩌든지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어쩌든지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시예요", "우리가 아는 것은 참 적어요. 뭘 좀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아는 것 가지고 폼 잡지 말고, 모르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른다고 하면 더 밑으로 떨어질 데가 없잖아요. 몰라서 삼가면 나도 남도 덜 다쳐요. 한 편의 시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경고예요"

2015-10-16     이태경
ⓒ한겨레

'극지의 시' 등은 시를 위해 순교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에 멈추진 않는다. '극지의 '시 등은 인간 실존에 대한, 삶의 허망함과 덧없음에 대한, 잘사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책이다.

"제가 이 얘기를 친구한테 해주었더니, 그 친구도 너무도 인상적이었던지 그날 밤 꿈을 꾸었대요. 여러 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니 아내가 죽어 누워 있더래요. 그 친구는 지난 세월 한 번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딴짓만 해온 것이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파 방바닥을 치며 울다가 깨어보니 꿈이더래요"('극지의 시' 중)

"우리는 말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말의 결과 재질을 거의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손등이 까졌을 때 공기 중에서는 아픈지 모르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따갑지요. 특히 소금물에 넣으면 더 쓰리지요.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게 쓰린 거예요", "태어나는 것, 밥 먹는 것, 연애하는 것, 오줌 누는 것, 꽃 피는 것, 머리카락 자라는 것, 모두가 속절없는 것들이에요"('불화하는 말들'중)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이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가까스로 인간이 된다. 인간 이상이긴 위한 노력 중 으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 공감에 바탕한 실천이다. 삶에 비루하게 연연하는 자는 인간 이상이긴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이 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렵고 서럽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이를 낳고, 어떤 이는 불멸의 예술품을 만든다. 이성복은 아이도 낳고, 불멸의 예술품도 낳은 행운아다. 세상은 엉망이지만, 깊어가는 가을 이성복을 읽으며 참혹한 시절을 견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