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마처럼 살고 싶다

문제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종마가 교미 과정에서 암말의 뒷발굽에 채여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시정마다. 일명 애무하는 말. 시정마는 암말에게 작업을 건다. 뒷발질하고 뿌리치는 암말을 어르고 달래서 암말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잡종말이다. 두세 시간에 걸친 시도 끝에 암말이 흥분하여 상대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면, 시정마는 끌려나온다. 공들여 흥분시킨 암말을 눈 앞에 두고 끌려나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소리도 지르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냥 질질질, 끌려 나온다.

2015-03-04     김민식
ⓒCorel

예전에 진화심리학에서 읽어보니 암컷과 수컷은 난자와 정자에 투자하는 정도가 다르기에 성선택에 있어 수컷은 더 많은 기회를 추구하고, 암컷은 꼼꼼히 상대를 가린단다. 아마 씨암말이 교미 이전에 난폭해지는 건, 그런 거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몇시간씩 대시할 수 있는 스태미너가 숫말에게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현업 PD로서 신인 배우 오디션을 보거나, 드라마 극본 공모 심사, 신입 PD 공채 심사를 하는 일이 많다. 배우건 작가건 연출이건, 모든 지망생의 삶은 힘들다. 기본적으로 경쟁률이 1000대 1 정도 되는 것 같다. 수백편의 대본이 공모에 올라오지만 방송으로 만들어지는 건 한두 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모든 대본은 당장에라도 제작할 수 있게끔 읽어보면 기획안에 인물 소개에 대사까지 꼼꼼히 공을 들인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은 수십억이 들어가는 작업이기에 대본의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 수백편 중 제작에 이르는 건 한 두 편에 불과하다. 피디나 아나운서 역시 1000 대 1이라는 공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자신의 꿈을 펼치는 일이란 이렇게 지난하다.

시정마가 불쌍해 보이지만, 그 시정마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암말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몇시간씩 애무를 시도하는 스태미너를 갖추어야 좋은 시정마가 될 수 있다. 교미 직전에 몇번 질질 끌려나왔다고 암말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면 시정마로서 낙제점이다. 매번 실패하지만, 마치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말처럼 그때마다 새롭게 흥분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시정마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시도가 잘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연출 기회, 새로운 집필 기회가 생기면 설레는 가슴으로, 마치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연출처럼, 한번도 망하지 않은 작가처럼 일하는 게 내 꿈이다.

하지만 꿈꾸는 이 순간, 흥분을 즐길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만족한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