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안보법안 반대시위 청년들에게 던져진 질문: "너네들 여기 연애하러 온 거 아니니?"

2015-09-29     곽상아 기자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안보법안’이 참의원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서 가결된 데 이어 19일에는 본회의마저 통과했다. 이로써 아베 신조(일본 총리)가 추진한 안보법안은 4개월의 논란 끝에 국회 심의를 통과하고 최종 성립됐다. 올해 초만 해도 안보법안이 일본 전체에 큰 이슈가 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속전속결 처리였다. 아베의 숙원인 “보통 국가”,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일본은 한걸음 더 성큼 나아가게 됐다.

두개의 저항이 있었다. 대체로 언론들은 국회 안에서 대립하는 여야를 조명하느라 분주했지만 국회 바깥에서도 의미있는 저항들이 있었다. 일본의 시민사회단체가 그 바깥에서의 저항을 이끌었는데 실제 주인공은 단체가 아니라 시민들 그 자체였다. 저항이 싹트던 5월과 저항이 본격화한 7월, 안보법안이 통과되던 지난 19일까지 국회 앞에서 그 저항들을 목격했다. 언론에 잘 전달되지 않은 일본 시민들의 날것 그대로의 저항의 단면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아시아의 민중들이 ‘일본인은 다 똑같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의 민중들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9월14일 도쿄도 지요다구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실즈’ 멤버인 한 20대 여성이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안보법안 반대 집회장에는 20대 젊은이들이 외치는 힙합 구호를 어른들이 따라 외치는 모습이 화제였다.

산케이신문의 시위대 숫자 계산법

6월 초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 6월3일 헌법학자 166명이 ‘안보법안 철폐’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4일 중의원 헌법심사회에 참석한 헌법학자 3명이 모두 아베의 안보법안을 “위헌”이라고 답변했다. 이 중에는 자민당이 추천한 학자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전혀 새로운 부류가 집회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들에 이어 학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법학자를 중심으로 7월에 ‘입헌 데모크라시 모임’이 발족했고,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 모임’이 발족했다. <마이니치신문>이 8월23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의 모임’이 집계한 결과 소속 교수와 학생이 안보법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대학이 8월22일 기준 약 90개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 19일 새벽 도쿄 국회의사당 앞 시위대가 들고 나온 하트 모양의 일장기.

이것은 일본에서 매우 새로운 풍경이었다. 3년 전부터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의 시민운동을 지켜보고 다양한 주제의 집회에 참여했지만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엔 주로 집회의 발언자가 남자였고, 2시간 집회 중 1시간30분은 저명인사들의 연설이었다. 그러나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내 머릿속에 기록돼 있다.

#장면1. 2015년 8월30일 오후.

한 꼬마가 자기 덩치만한 크기의 스케치북에 ‘아이들을 지키자’라고 크레용으로 글씨를 쓴 손팻말을 목에 걸었다. 이어 데이트 장소로 집회장을 고른 듯한 남녀 커플, ‘헌법 9조를 지키자’고 쓴 손팻말을 들고 온 중년 부부, 투명 비닐우산 위에 ‘안보법안 반대’라는 글자를 붙이고 온 노년 남성, ‘전쟁법안 반대’ 깃발을 자전거에 달고 국회 주변을 계속 도는 사람들, 빗속에서도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나온 엄마들이 국회 앞을 뒤덮었다.

전에 볼 수 없던 시위의 풍경에 다음날 일본 언론들은 발칵 뒤집혔다. 대부분 신문사가 조간 1면에 이날의 시위 현장을 실었다. 1960년 안보투쟁(1960년 미국 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 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운동으로서 일본 민중운동사의 최전성기로 평가된다) 때의 모습과 2015년 8월30일을 비교하며 실은 신문사도 적지 않았다. 참가자 수는 주최 쪽 추산 12만명, 경찰 추산 3만3천명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벌어졌던 2012년 9월23일 ‘탈원전 촉구 집회’(잘가 원전 1000만명 액션) 때 20만명이 모인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린 것이었다.

은 8월31일치 기사에서 ‘안보법안 반대 데모, 진짜 참가자 수를 본사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정문 앞 경비를 섰던 경찰차량 앞에 기동대원이 15명 서 있었던 항공촬영 사진을 기준으로 해서 3만2400명이 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인기 없는 야당을 향해 “힘내”

#장면2. 2015년 9월17일 저녁.

“민주주의가 뭐야?”

“민주주의가 어떻게 생긴 거지?”

“야당 힘내.”

가장 인상 깊었던 구호는 “야당 힘내”라는 외침이었다. 한국에서 제1야당이 그 영향력에 비해 시민사회에서 인기가 없는 것처럼 일본의 민주당과 공산당도 이곳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야당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시각 국회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법안 저지를 위해 총리를 비롯해 방위성장, 참의원 의장 등에 대한 면책결의안을 제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3. 2015년 9월19일 새벽 2시18분.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포함해 지금까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얘기를 듣던 젊은 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얘기해서도 어느 정치단체에 소속해서도 이른바 동원된 발상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나아갈 방향,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 고민하고 일어선 것입니다.” 지난 15일 열린 일본 참의원 특별위원회 중앙공청회에 참석한 실즈의 오쿠다 아키(23·메이지학원대 4학년)의 발언 중 일부이다.

의 오락방송이 ‘실즈를 해부한다’라는 주제로 프로그램(비트 다케시의 어떻게 생각하나요)을 내보낸 적이 있다. 크게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었다. (1) 연애하려고 집회 참가한다 (2) 뒤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특정 정당이나 단체가 있다 (3) 앞으로 자신의 진로에 도움을 받기 위해 참여한다(국회의원 출마 등). 방송은 실즈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데모는 무서운 것? 이제는 일상”

일본 사회에서 1960년 안보투쟁 이후 ‘데모’는 무서운 것이었고 특정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렇지 않다. 더이상 데모는 일본 사회에 낯설지 않고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정치가 자신의 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고 발언하는 20대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9월19일부터 23일까지 일본에는 이른바 ‘실버위크’라 불리는 연휴가 시작되었다. 정부 관계자 및 여당은 공공연히 연휴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안보법안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발언했다. 여당이 새벽에 법안 통과를 강행한 배경에는 그런 인식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지금의 저항 분위기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 이어질지 불안한 시선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실즈의 활동에 자극받은 40~50대가 ‘미들스’(MIDDLEs)란 네트워크를 만들고, 안보법안에 반대했던 연구자, 헌법학자, 엄마들은 이제는 ‘법안’이 아닌 ‘법’이 된 안보법제에 계속 반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단체 이름에서 ‘안’을 빼고 그대로 활동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가까운 장래에 10만명이 모이는 데모를 다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데모가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되었다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지금, 일본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