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민족이란 멍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 문화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저녁을 먹는 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2015-09-22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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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시대다. 집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편리함이 항상 즐거움으로 기억되던가?

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 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홀로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당신이 어제 야식을 배달시켜 먹었다면 야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 보면 야근의 괴로움과 야식의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 문화는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배달 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ELLE KOREA에 게재된 칼럼을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