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혐오표현을 제한할 것인가

1) "Roh는 17세였고 그의 지능지수(IQ)는 69였다. 그는 6세 때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결과 뇌에 결함이 생겨 고통받았다." 2) "잠재적인 범죄자나 다름없는 외국인에 대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해도 부족할 판에 다문화 입학전형? 더 이상의 외국인 우대정책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이 둘 모두 대학교수가 한 발언이라면, 과연 어느 쪽의 해악이 더 클까?

2015-09-14     홍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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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의 혐오시대유감

2) "잠재적인 범죄자나 다름없는 외국인에 대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해도 부족할 판에 다문화 입학전형? 더 이상의 외국인 우대정책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해악을 측정할 '잣대'가 필요하다

1)의 발언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심한 조롱이자 모욕이다. 망자에 대해서는 함부로 농을 치지 않는 우리네 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노무현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존경심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엄청난 상실감을 생각하면 이런 조롱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반면 2)의 발언은 표현상으로 점잖아 보인다. 확신에 차 있지도 않고, 선동조도 아니며, 표현 자체가 심각하게 품위를 잃었거나 모욕적인 것도 아니다. '학문적 의견'의 모양새까지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일견 '점잖은' 발언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요즘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기사만 올라오면 노골적인 비난 댓글이 줄을 잇곤 한다. 비난은 이자스민 의원을 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한 외국인 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혐오표현은 단 한 명의 개인을 지목하건, 전체 소수자 집단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건 간에 소수자 집단 전체에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외국인 일반을 향한 혐오표현은 '집단' 전체를 향한 것으로 더욱 심각한 일로 여겨진다. 2012년 외국인범죄 척결연대 회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브리지트 바르도는 왜 처벌을 받았나

또한 개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과 구조적 차별을 조장하고 고착화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혐오표현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다. <혐오표현에서의 해악>이라는 책으로 미국에서 혐오표현 규제 논쟁에 불을 지핀 정치학자 월드론(J. Waldron)은 혐오표현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존엄한 존재로서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의 '공공선'(public good)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뿌리 깊은 차별 관행이 '말'로서 분출된 것이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인종차별 문제를 천착한 저서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인종차별이 논리적으로는 허술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단단한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파한 바 있다.

여성 혐오의 경우, 최소한 방송에서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여성 혐오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난 옹달샘의 구성원 개그맨 장동민·유상무·유세윤이 지난 4월 여성 혐오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말이라도 관계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학생이 수업시간에 2)와 같은 말을 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적다. 교수와 다른 동료 학생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그 해악이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는 교수에 의해 행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러한 발언은 학생으로서의(고용관계라면 노동자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교육권(고용관계라면 노동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맞받아치기(talking back)나 공론장에 의한 자율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표현이 어떤 '마당'에 던져진 것인지도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직장이나 학교뿐만 아니라, 방송에서의 표현도 해악이 크다. 방송이 갖는 공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방송에서 국제법과 국내법상 금지하고 있는 '차별'을 조장하는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단으로서의 소수자'임이 명확해져야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부인죄가 자리를 잡은 것은 홀로코스트 부인이 단순한 역사 부정이 아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일제 찬양이나 민주화운동 부인을 처벌하는 법률이 추진되고 있지만, 이것이 유럽에서와 같이 정당화되려면, 일제 피해자나 민주화운동 관련자, 또는 특정 지역 사람들이 '집단으로서의 소수자'임이 좀더 명확해져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