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조달러, 사상 최대 상속전쟁이 시작된다

빌 게이츠 같은 통 큰 기부는 앞으로 점점 구경하기 어려울 듯하다. 일단 1세대 슈퍼부자들의 올해 기부 규모는 전년과 거의 변함이 없거나(75%) 늘어날 것(22%)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자녀들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세대보다 기부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55%). 자녀들은 아버지세대보다 명품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66%). 세계 어디서나 재벌2세들의 행태는 비슷한 모양이다.

2015-03-23     곽노필
ⓒShutterstock / aslysun

런던 최고급 주택가 가운데 하나인 켄싱턴 지역. 위키피디아

순자산 3000만달러 이상 슈퍼부자 17만2850명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는 부자들의 실체를 일부 들여다 볼 수 있는 보고서가 최근 잇따라 나왔다. 하나는 영국의 글로벌 부동산컨설팅업체 나이트 프랭크(Knight Frank)가 발표한 '2015 부 보고서'(Wealth Report 2015)이다. 컨설팅업체 웰스인사이트의 통계 자료와 전 세계 500여명의 은행가, 자산관리 전문가들에 대한 설문을 기초로 만들었다. 한 사람당 평균 34억달러(약 4조원)의 재산을 관리하는 최상류층 전문 관리자들이 전해주는 그들의 실상이다. 다른 하나는 미 보험사 NFP와 자산컨설팅업체 웰스엑스(Wealth-X)가 함께 발표한 '웰스 엑스-NFP 가족 자산 이전 보고서'이다.

2014년 현재 세계 지역별 슈퍼부자 현황.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전체 합치면 20조달러가 훌쩍...하루에 15명씩 증가

80대 슈퍼부자들의 평균 재산은 3억달러다. 40대 이하 부호들의 5배다. 웰스엑스 보고서.

하지만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자산 증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은 최고 상류층의 자산 증가는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자리에 드는 현실에 비춰볼 때 '부도덕'(moral outrage)한 것이라고 질타한다. 보고서를 토대로 그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뜯어보자.

향후 세계 슈퍼부자들의 상속 재산 규모 전망. 웰스엑스 보고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상속...향후 30년간 16조달러 향방이 정해진다

상속이 첫손으로 꼽힌 건 창업 1세대의 다수가 이제 노령화했기 때문이다. 웰스엑스 보고서에 따르면 슈퍼부자들의 평균 나이는 59세이다. 60대가 25%, 70대가 13%, 80대가 6%다. 60대 이상 노인층이 절반에 가깝다. 한국의 삼성, 현대차가 요즘 상속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상속은 당장의 현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빌 게이츠 같은 통 큰 기부는 앞으로 점점 구경하기 어려울 듯하다. 일단 1세대 슈퍼부자들의 올해 기부 규모는 전년과 거의 변함이 없거나(75%) 늘어날 것(22%)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자녀들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세대보다 기부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55%). 자녀들은 아버지세대보다 명품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66%). 세계 어디서나 재벌2세들의 행태는 비슷한 모양이다.

해외이주를 고려하고 있는 슈퍼부자들의 비율.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해외 이주를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 '세금'

슈퍼부자 10명 중 1명(12%)은 올해 거주지를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다. 거처를 옮기는 가장 큰 이유는 세금(77%) 문제이다. 역시 부자들에겐 돈을 지키는 게 급선무다. 이어 건강(63%), 사업적 이유(54%), 자녀교육(49%), 안전(47%), 정치적 현안(40%) 순으로 거주지를 옮기려는 이유로 꼽혔다.

나이트 프랭크의 리암 베일리(Liam Bailey) 글로벌리서치담당 책임자는 "이들은 지난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세금을 둘러싼 논란이 격해지고 있는 것에 크게 민감해졌다"고 말한다. 덧붙여 중국에선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운동이 부자들을 바깥으로 눈 돌리게 만들고 있다. 러시아 부자들에겐 자신의 신변 안전이 해외이주의 주된 이유로 꼽힌다.

슈퍼부자들의 도시별 분포. citylab.com

런던, 뉴욕 제치고 슈퍼부자가 가장 많은 도시로

영국의 기숙형 귀족학교인 이튼 칼리지. 전세계 부호들이 자녀들을 이곳에 유학시키려 한다. 영국 기숙학교는 제국주의시절 식민지 관리와 상류층들이 자녀들에게 영국의 문화와 전통을 심어주기 위해 도입한 교육 방식이다. 이튼 칼리지 웹사이트.

'세계의 8학군' 런던 기숙학교

에 소개된 영국 사립학교협의회 자료를 보면, 2104년말 현재 이튼 칼리지를 비롯한 런던 기숙학교 학생의 32%(6만8453명 중 2만1928명)가 외국유학생이다. 출신국을 보면 홍콩(4704명)이 가장 많지만, 최근에는 중국인과 러시아인 학생이 급속히 늘고 있다. 2007년 2345명이었던 중국인 학생은 지난해 4381명으로, 같은 기간 러시아인 학생은 816명에서 2536명으로 급증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들어 런던에 유학 오는 자녀들의 나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보통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13살 무렵에 유학을 왔으나, 지금은 7~8세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유학을 오는 아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호주 동부 해안은 아시아 부자들이 선호하는 해외부동산 투자지역이다.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런던행 이삿짐을 싸는 중국과 러시아 부자들

각 나라의 부자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곳은 조금씩 다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호주를 선호해 왔다. 2013년 500만호주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중요투자비자(SIV) 신청자의 90%가 중국인들이었다. 인도 백만장자들은 전통적으로 영국과 미국, 호주를 선호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부자들은 영국과 스위스를 선호한다. 러시아에선 7만3천명의 백만장자가 2013~2014년 외국여권을 받았는데, 영국과 미국이 가장 많았다.

모나코에는 왜 부자들이 몰릴까

지중해 연안의 모나코는 인구당 기준으로 슈퍼부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슈퍼부자 증가세는 조금씩 빨라질 전망이다. 10년 후인 2024년 세계 슈퍼부자 수는 지금보다 34% 늘어난 23만1000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한 해 전의 향후 10년 전망치 28%보다 높아졌다.

2014~2024년중 슈퍼부자 증가속도가 가장 빠를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들.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향후 슈퍼부자 증가율 1위인 나라는?

보고서는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차이나) 이후의 새로운 신흥국가군 '민트'(MINT)를 주목한다. '민트'는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회장이 작명한 용어이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터키 네 나라를 가리킨다. 민트 그룹의 다음 10년 슈퍼부자 예상 증가율은 76%로, 브릭스의 72%를 웃돈다.

세계 백만장자(슈퍼부자가 아님)들의 유출입 상위 지역들.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한국의 슈퍼부자는 1622명, 10년 후엔 2184명?

그럼에도 10년 후 중국의 슈퍼부자는 87% 늘어난 1만5681명으로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라설 전망이다. 지난해엔 5위(8366명)였다.

향후 10년간 슈퍼부자 숫자가 가장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세 도시.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스위스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싱가포르

세계 부자들의 피라미드 구조(2014년 기준).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글로벌 대도시들, 슈퍼부자들의 폐쇄된 성채가 될 것"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쿠퍼(Simon Kuper)는 지난 2013년 '파리에서 쫓겨나다(Priced out of Paris)'란 제목의 칼럼에서 "앞으로 글로벌 도시들은 최상위 1%가 자신을 재생산하는 엘리트들의 성채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뉴욕, 런던, 파리 같은 대도시들의 지금까지의 도시 성장은 '고급화'(gentrification)였지만 앞으로는 '금권화'(plutocratisation)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대도시에서 중산층과 소기업은 '계층 청소'의 희생양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런 식의 도시 재생산 시스템은 이들 도시 내부의 격차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그동안의 도시 성장을 뒷받쳐준 창의성과 다양성을 망가뜨릴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는 슈퍼부자들의 성장을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엘리트 계층의 탄생'으로 표현했다. 이들에겐 자신의 커뮤니티 역할을 해주는 도시에 대한 정체성은 있지만 국적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 뉴욕에 사는 최상류층의 네트워크와 대안은 영국의 런던이지, 뉴욕에서 가까운 중소도시 버팔로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나이트 프랭크는는 2008년 이후 매년 세계 슈퍼부자 보고서를 발표해오고 있다. 이번이 8번째다. 이번엔 97개국 108개 도시의 부호들을 조사했다. 웰스 엑스는 5대륙 13곳의 현지 사무소가 보내온 자료 등을 토대로 이번에 처음으로 보고서를 냈다.

슈퍼부자들은 어디에 돈을 쓸까

자가용 제트기 수요는 중국인 부자들이 가장 많다. 나이트 프랭크 보고서.

이들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32%다. 자산관리자들은 이들 중 35%는 올해 부동산 투자를 늘릴 것이라고 전했다. 투자 대상으로는 주택(81%)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투자 지역은 전체적으로 국외(42%)보다 국내(58%)가 더 많았으나, 러시아 부자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89%)를 압도적으로 앞세웠다. 중동(77%), 중남미(57%)의 부자들도 해외부동산 투자를 더 선호했다.

명품은 부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과시하는 특별한 수단이다. 자산관리자 3명 중 1명은 슈퍼부자들이 지난해보다 올해 명품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쓸 것으로 보고 있다. 더 적게 쓸 것으로 보는 사람은 8%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품들 예술품과 시계, 와인, 클래식 카 등이다. 명품 시장에서는 중국 부자들이 단일 국가론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고객이다. Bain & Altagamma에 따르면, 세계 명품 시장의 29%가 중국인 부자들 덕분에 먹고산다. 특히 중국 슈퍼부자들의 경우, 자가용 제트기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높다. 보고서는 중국의 자가용 제트기 수가 지금의 330대에서 2023년 1275대로 늘어날 것이라는 봄바디외 항공사의 예측을 증거로 제시했다. 중국 부자들의 주요 항로는 베이징과 홍콩이다.

지난해 3811만달러에 팔려, 클래식카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한 1962년형 페라리 250 GTO 베를리네타. Bonhams.

무려 1000억원이 넘게 팔린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품 '청동마차'. 소더비.

미술품은 지난 몇년간의 침체를 겪다가 지난해 15% 성장했다.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 '청동마차'가 지난해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렸다. 지난해 11월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0만달러(약 1100억원)로 새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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