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중의 한나절

지금 딸은 취업준비 중이고 아들은 학생이다. 양육은 끝났지만 경제적 독립은 못한 상태. 어쨌든 이제부터는 부모 자식 간이라기보다 인간관계의 보편적 규칙을 적용할 시기다. 그 첫 번째 원칙은 일정거리 유지가 될 터. 서로 강요하지 않기,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기 연습도 필요한 훈련이다. 습관성 훈계를 자제하려 노력한다. 자식 인생에 최소 개입의 원칙을 지켜 조언은 요청받을 때만 하기로 한다. 아프리카 사막의 유목민들은 "서로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 각자의 텐트 간격을 더 멀리 한다."고 한다. 오래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 새겨들을 말이다.

2015-08-28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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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한가롭게 산책하는 풍경 속, 야구 글러브를 낀 젊은 아빠가 예닐곱 살 딸들과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교습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기를 그네에 태우며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할머니,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엄마 둘, 조금 부자유한 몸으로 혼자서 걷기 훈련 중인 할배. 줄에 맨 강아지가 똥 누는 곁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대기 중인 40대 여성까지 공원 풍경은 어디나 엇비슷하게 평화롭다.

어느새 해님의 위치가 바뀌었나. 내 벤치가 추워졌다. 느릿느릿 일어나 햇빛 속에 놓인 의자로 자리를 옮긴다. 30분은 이 벤치에서 더 버틸 참이다. 이번 여행은 남편과, 딸, 아들이 함께 하는 3박4일 가족 여행이다. 일정의 대부분을 함께 했지만 사흘째인 오늘 오후 한나절은 자유일정으로 흩어졌다. 별보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홋카이도 대학과 시민천문대를 찾아 떠났다. 딸과 아들은 디저트 카페 순례로,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쇼핑하러 도심에 머무를 모양이다. 나는 신궁을 둘러본 다음 근처 쇼핑몰의 식품부를 구경할 생각이다.

삼시 세끼 밥을 온 가족이 함께 먹는 것도 신선하다. 남편이 지방에서 일하는 데다 아들이 지방 대학에 다니는 관계로 자주 얼굴 보기가 어려워진 까닭이다. 점심이나 저녁 메뉴를 고심하는 일부터 노보리베츠 온천행 교통편과 동선을 의논하느라 거의 가족 MT를 방불케 하는 상황. 우리의 '7순 여행'에도 딸과 아들을 섭외해볼까? 수퍼 프레쉬한 생선을 얹은 초밥에 맥주를 들이키며 은근히 로비를 일삼는다. 남편과 나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과 아들은 명랑하게 건배를 외친다.

딸과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 속, 그들을 도우며 엄마와 아빠도 성장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안위를 내 자신의 안위보다 기쁘게 우선시할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된 것도 엄마 노릇의 소득이다. 아이들과의 자잘한 갈등과 의견 대립을 절충하고 타협하는 협상력이 커진 것도 그 일부. 화가 나서 고약한 말을 던진 경우,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사과하는 법도 익혔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사이 내가 사람과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는 인간이 됐다고 감히 자평한다. 딸과 아들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엄마와 아빠를 성장시킨 셈인가. 확실히 자식 키우기는 남는 장사다.

언젠가 딸과 아들은 집을 떠날 것이다. 또 언젠가 영영 이별의 날도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남편과 나는 그들과 기분 좋게 헤어지고 싶다. 남편과 나에게 아빠와 엄마라는 특별한 직함을 부여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면서. 그러고 보니 엄마로서의 내 목표는 무사히 달성될 것 같은 예감이다. 그건 딸과 아들이 이번 생애를 멋들어진 한판으로 살다 가는 거다. 지구여행자에게 허락된 온갖 쓴맛과 단맛, 예컨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실연의 아픔에 급기야 변비로 끙끙대는 고통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 빡세고 즐거운 수행의 여정을 풀코스로 살아내는 것,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