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 꿈이었던 산골소년은 지뢰 사고로 모든 걸 잃었다(사진)

2015-08-27     원성윤

집 앞의 파로호에서 지난 1980년 발목 지뢰가 폭발하면서 두 손을 잃은 강원 화천군 간동면의 이영식 씨. 당시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가슴까지 크게 다쳤던 그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고통과 가난을 대물림하는 지뢰는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인지뢰의 생산, 사용, 비축, 이동을 금지하고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도록 지난 1999년 발효된 대인지뢰금지협약(오타와협약)에 160여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입돼 있지 않다.

1980년 9월 말 중증 장애인이 됐다. 누나, 동생과 함께 화천 파로호에 빨래하러 갔다가 지뢰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산골마을에만 살아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차량을 타고 훈련 나온 장병이 멋있어 군인이 되고 싶다던 소년의 꿈은 사고와 함께 영영 사라졌다. 이후 학교를 중퇴했고, 현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홀로 살고 있다.

장마철 상류에서 떠내려온 지뢰다 보니 호숫가에 지뢰 주의를 당부하는 안내판이 있을 리도 없었다.

사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고통과 가난을 대물림하게 하는 지뢰는 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뢰 사고 피해자 고준진(65)씨. 고씨는 강원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 살던 22세 때 나무하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고 4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서울 노원구 자택에서 만난 고씨는 "다시는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지뢰를 걷어내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날짜도 잊지 않습니다. 1972년 12월 28일입니다. 나무하러 갔다가 '번쩍' 했는데 깨어보니 제가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

장남인 고씨는 입대를 앞두고 식구들을 위해 장작을 쌓아두려고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참사를 당했다.

익숙한 산길을 별다른 생각 없이 걷다가 지뢰를 밟았다. 몸은 폭발 충격으로 공중에 떠서 나뭇가지에 걸리고 한쪽 다리는 잘려 없어졌다. 다른 한쪽은 발목 아래가 사라졌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고씨를 들쳐메고 시내로 달렸으나 출혈이 너무 심해 얼마 후에는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 보름 남짓 지나다 보니 잘라낸 다리 끝에서 화기가 올라왔어요. 당시 허술한 의술 때문인지 항생제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국, 재차 수술을 받았는데 보름 후에 같은 증상이 나타났어요. 별 수 없이 또다시 수술을 했죠. 5년 전에도 염증 때문에 서울에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 끝에 다리는 점점 짧아졌고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고씨는 "아버지는 일제시대 갈말읍에서 광복군으로 뽑혀 독립운동을 했을 만큼 체격과 체력이 좋았는데 50대 중반에 돌아가셨고 동생도 생활고를 겪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뢰 사고 때문에 온 집안이 고통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보상금을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지난해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돼 위로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씨의 불만은 여전하다.

"정부는 외국 지뢰 피해자와 제거활동은 지원하면서 정작 국내 지원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이달 남북 갈등의 도화선이 된 목함 지뢰 사건을 두고는 "다시는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지뢰를 걷어내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1년 4월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 대룡산 자락 밭에서 20cm 크기의 살상용 대인지뢰 4발이 발견돼 군 폭발물처리반(EOD)이 제거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작농인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던 박 씨는 1981년 7월 27일 오전 11시 30분께 친구 2명과 함께 소의 먹이인 꼴을 베려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들어갔다가 발목지뢰를 밟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28년이 되던 날이었다.

폭발 당시 박씨는 땅바닥에 곤두박질했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귀에서는 '윙∼'하는 이상한 소리만 맴돌았다. 다리는 감각이 없어 독사가 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살려면 독이 온몸에 퍼지기 전에 피를 빼내야 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낫으로 다리를 몇 번이나 찍었다.

응급 처치라고는 속옷을 찢어 다리를 묶어준 것이 전부였다. 부대 측은 '다리를 사다리에 얹어 놓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중에 민통선 초소 밖에 내려놓고 되돌아가 버렸다.

당시는 지뢰가 뭔지도 모르던 시대여서 작전상 매설했으면 위험성을 알려줘야 했는데도 군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박씨는 개탄했다.

박 씨는 사고 이후 의족을 한 채 형의 젖소 목축 일을 도와가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국가가 지뢰 피해자를 전수 조사해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사고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단서 등을 떼는 데 드는 몇십만 원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증빙자료를 어렵게 구해도 위로금은 겨우 1년치 병원비 수준이다.

지난 4월 7일 강원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서 열린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 설명회에서 지뢰 피해를 본 주민이 상념에 잠겨 있다.

지난해 10월 지뢰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으로 삶의 한 줄기 빛이 찾아올까 기대했지만 사고를 입증할 길이 없어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이 씨는 매달 지급되는 48만원 가운데 33만원을 여관비로 내고, 나머지는 식비나 치료비로 쓴다.

지뢰 피해자를 돕는 사단법인 평화나눔회 관계자는 27일 "증빙서류를 만들려면 치료 병원이나 고향을 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고, 보상금을 나누는 조건으로 증언하겠다는 사람도 있어 마음의 상처를 받는 피해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계 부처는 예산 타령만 하는 데다 오래전에 사고를 당하고, 연세가 높을수록 위로금이 더 적은 것도 문제인 만큼 특별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