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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성은 지금까지 205채의 집을 무료로 수리했다

  • By HuffPost Korea Partner Studio
  • 입력 2018.11.07 15:57
  • 수정 2018.11.12 18:16

“저를 위해서 한 일이에요.” 소외된 이웃을 위해 13년째 집수리 봉사를 하는 박영애 씨가 말했다. 205채가 넘는 집을 대가 없이 손수 수리하면서도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하단다.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든 깨끗하게 변한 집에서 편히 쉬실 수 있다면 그걸로 저는 기쁠 뿐입니다.”

ⓒchinaface via Getty Images

영국 록밴드 애니멀즈의 ‘해 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박영애 씨의 통화 연결음이다. 강렬한 전자음만큼이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건강한 에너지가 넘쳤다. 실제 해 뜨는 집을 만들어가고 있는 집수리 봉사자, 박영애 씨는 어르신들 가정 방문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졌다며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1992년 아동 돌봄을 시작으로 27년간 꾸준히 취약계층 생활지원, 목욕봉사, 급식봉사 및 도시락 배달, 어르신들 안부 전화, 말벗, 경로당 방문 등을 시행했으며 2004년부터 ‘뜨락나누리봉사회’를 직접 결성해 18명의 단원과 소외이웃의 집을 수리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총 205채의 집을 수리했으며, 지금도 매주 2채씩 늘어가는 중이다.

올해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보건복지부·KBS·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에서 최고의 영예인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그녀는 봉사회 전체가 받았어야 하는 상이였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상으로 인해 봉사회가 널리 알려져 더욱더 많은 가정의 집수리를 하고 싶다고. 봉사로 아픔을 이겨내고 평범한 주부에서 집수리의 달인이 되기까지의 히스토리를 알아봤다.

 

평범한 주부였던 내가 집수리의 달인이 된 까닭

13년째 김해를 중심으로 소외 가정의 집수리 봉사를 하고 있는 '뜨락나누리봉사회'의 모습. 박영애 씨는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3년째 김해를 중심으로 소외 가정의 집수리 봉사를 하고 있는 '뜨락나누리봉사회'의 모습. 박영애 씨는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Q. ’뜨락나누리봉사회를 직접 결성하고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6년 논 한가운데 비닐 천막으로 집을 짓고 사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됐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컨테이너를 놔 드렸는데, 한여름에는 컨테이너가 달궈져서 집 안에 있을 수 없고 겨울에는 수도가 꽝꽝 얼 정도로 추워서 도저히 생활할 수 없더라고요. 목수로 일하는 친정 오빠에게 단열 시공을, 신랑에게 창을 내달라고 부탁했던 게 집수리의 시작이었어요. 봉사회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결성했지만, 할아버지 집을 수리했던 자신감이 바탕이 됐죠.

Q. 집수리는 노하우가 없으면 진행이 어렵다고 들었어요.

도배하는 박영애 씨의 모습
도배하는 박영애 씨의 모습

처음에는 도배, 장판만 할 생각으로 재능 기부 형식으로 도배장이를 불렀어요. 흔쾌히 승낙하더라고요. 목수인 오빠도 불러서 한 달에 딱 한 번. 일요일에 집 2~3채만 수리하자고 설득했어요. 적어도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보자고.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나머지 단원끼리 영역을 나눠서 도배, 청소, 빨래, 부엌, 정리까지 팀을 정해서 일을 진행해요. 13년째 하다 보니 모두 달인이 다 됐죠.

Q. ‘뜨락나누리봉사회’를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요?

집수리를 진행했던 독거노인들을 모시고 연 1~2회 경로잔치 겸 음식을 대접했어요. 한 번은 뷔페를 모시고 갔는데 어르신들이 ‘회’를 화장지에 싸서 가시는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회’는 상할 수 있어 떡을 가지고 가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이시니까. 드실 기회가 별로 없던 거예요. 그런데 저희도 적게나마 받고 있던 후원이 끊기고 신랑도 전 비용을 지원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지난 2년째 진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다시 하고 싶어요.

Q. 그렇다면, 집수리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을 때는 언제였는지요?

흙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온몸에 흙이 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집 상황이 좋지 않더라고요. 깨끗한 도배지를 사다가 싹 다 발라드리고, 부엌이며 살림살이 정리를 한 뒤 이불까지 빨아드리고 나왔죠. 다음날 할머니께서 눈을 뜨셨는데 다른 집인 줄 아셨대요. 그게 제 보람이고 기쁨이에요.

죽음을 결심했던 1992년, 그 이후

ⓒSANCHAT SANCHAINARA via Getty Images

Q. 본래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1992년, ‘자녀 돌봄 위탁’이 첫 봉사활동이었어요. 그때 나이 서른셋 이었죠. 당시에 신랑이 하던 공장의 직원이 다쳐 병원을 뛰어다녀야 했어요. 엎친 데 덮친다고 당시 1억 원이 넘는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죠. 모든 걸 다 갖고 있다 한순간에 사라지니 못 참겠더라고요.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우울증이 심하게 왔고요. 딱 죽겠다 싶었을 때 김해에 활천동사무소를 찾아가 ‘나는 돈도 아무것도 없는데 돈 안 드는 노력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세상에 있나 확인해보려고요. 봉사 정신이 투철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제가 살려고 했어요. 살아보려고.

 Q. ‘자녀 돌봄 위탁’은 어떤 일이었는지 궁금해져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와 유치원 다니는 남자아이가 있는 집을 돌봐주는 일이었어요.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빠는 간경화에 걸려 보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죠. 아이들끼리만 생활하니 간장과 김으로 끼니를 해결하더라고요. 그래서 밑반찬을 해주고 빨래나 청소를 도와주는 일을 맡아 했어요. 참 이상하게 봉사를 하면서 마음이 나아지더라고요. ‘애들도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사는데, 내가 왜 못살아’하는 오기가 생기고요.

ⓒIsabel Pavia via Getty Images

Q. 그럼, 아이들과의 인연도 계속 이어지고 있겠죠?

당시에 저는 부끄러워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했어요. 아이들 등교하고 집에 갔다가 하교하는 종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왔어요. 대신에 편지로 대화를 했어요. ‘민아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라’하고 쪽지를 남기면, 애가 ‘이쁜 아줌마 보고 싶어요’하고 써 놨죠. 그렇게 8개월 정도 지나니 아빠가 돌아가셔서 엄마가 아이들을 찾으러 왔어요. 엄마랑 애들이 저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거절했죠. 대신 몰래 장례식장에 가서 얼굴을 봤어요. 애들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냥 지나쳐 갔고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보잘것없는 사람이 빨래나 청소를 해주는 걸 아이들이 싫어할까 봐.

30대 박영애 씨는 부끄러웠다.

이제 60이 된 그녀는 아이들을 만났던 덕분에 살아갈 수 있게 됐죠! 호탕하게 웃는다.

 

ⓒKind via Getty Images

나눔과 삶, 그리고 내게 온 ‘행복’

Q. 2018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셨어요.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최고상의 타이틀을 받은 소감 한 말씀!

보건복지부에서 ‘국민 훈장’이라고 직접 전화가 왔어요. 그 소리를 듣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상을 받기 위해서 한 일도 아니었고 내 보람에, 좋아서 한 일인데 상 받을 일인가 하고요. 신랑이 가장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옆에서 도와주고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오래도록 못 했을 거예요. 잘 챙겨주지 못한 엄마라도 항상 응원해준 아들에게도 고맙습니다.

도시락 배달을 하기 위해 직접 재료를 손질 중인 박영애 씨(가운데)
도시락 배달을 하기 위해 직접 재료를 손질 중인 박영애 씨(가운데)

Q. 봉사가 박영애 님의 삶에 어떤 변화를 몰고 왔는지요?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진리요. 2010년, 봉사활동을 하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5톤 트럭과 충돌을 했는데, 트럭 기사가 내 탓을 하며 ‘욕’을 하더라고요. 블랙박스도 없었는데, 차 뒤로 쫓아오던 오토바이, 포터, 사고가 났던 길가의 가게 사람들이 모두 제 편이 돼 줬어요. 오토바이 기사가 ‘걱정하지 말라. 내가 증언해주겠다’고 하는 데 정말 고맙더라고요.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베푼 것들이 되돌아온다고 몸소 느꼈어요.

Q. 한번 시작하면 10년,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내 보람’이요. 200여 채의 집수리를 하면서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할머니들에게서 ‘고맙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현장에서도 가스 불이나 물도 쓰지 못하게 하셔요. 우리가 고쳐드리는 건 데도요. 그래도 행복해요. 할머니가 고맙다고 하든 안 하시든 깨끗하게 변한 집을 보면 마냥 기뻐요. 남을 위해서 하라고 했으면 못 했을 텐데 ‘내 보람과 기쁨’이 느껴지니 절로 하게 되죠.

ⓒEva Katalin Kondoros via Getty Images

Q. 하지만 봉사는 특별한 이들만 하는 활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별하지 않아요. 봉사를 망설이는 건 ‘보람’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죠. 하고 난 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서. 저 또한 목욕 봉사를 하게 되면 힘들어서 ‘내 다음 주에는 못 하겠다’ 말해요. 그런데 신기하게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싹 다 잊어버리고 다음 주에 또 가죠.

Q. 연말을 맞이해서 봉사를 해볼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생활신조가 ‘나보다 널 위하여’예요. 누군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나를 위한 일이 되더라고요. 결국엔 자신을 위한 봉사를 했던 거예요. 심적, 물적 여유와 상관없이 올겨울엔, 자신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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