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사랑스러웠던 딸이 죽고 2년 뒤, 나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나는 임신중단을 택했다

아이가 죽고 난 후의 임신은 소위 '축복'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임신은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Jess Healy 제공.
Jess Healy 제공.

19살, 나는 처음으로 임신했다. 대학교 파티에서 나는 위스키를 마시고 숲에 앉아 울며 남자친구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불과 몇 달밖에 사귀지 않았다. 우리는 책임감 없는 애들이었고, 확실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었다. 남자친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버지는 300달러를 보내주셨다. 몇 주 뒤, 'Planned Parenthood in Phoenix'라는 곳에서 임신중단을 했다. 1999년의 일이었다.

그 뒤로, 피임에 더욱 신경 썼다. 페서리(diaphragm with spermicidal jelly-질 상부를 밀봉하여 정자가 자궁 내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피임 기구)를 쓰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약 6주 후, 메인 주의 남부에서 여름을 함께 보내던 도중 나는 다시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을 때, 나는 나의 작은 아파트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친구 역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이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재빨리 메인 주에서의 생활을 접고, 애리조나로 돌아가 집을 렌트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했다.

앤토니아는 2000년 2월 3일, 애리조나의 집에서 지역 조산사의 도움으로 12시간의 진통 끝에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가정 분만을 원치 않으셨지만, 나는 '영적 산파술'을 읽고 신성한 과정을 경험하고 싶었다. 앤토니아가 태어난 후, 조산사들은 피자를 시키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떠났다.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이틀 동안, 앤토니아의 아빠와 나는 24시간 동안 번갈아 가며 깨어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남자친구가 그의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아기가 자야, 다행히도 너희 둘 다 잘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어렸고, 바보같이 자신감이 넘쳤으며 아는 것도 없었다.

다음 해에는 점차 삶을 찾았다. 수업과 일, 공부, 친구들의 돌봄, 부모님으로부터의 금전적인 지원까지. 두 부모님의 첫 손녀로, 앤토니아는 부족함 없는 관심을 받았다. 앤토니아는 빵빵한 볼로 잘 웃었다. 나는 포대로 앤토니아를 안고 잘 잤다. 우리는 사랑과 젊음으로 충만했다. 앤토니아는 기적이었다.

 

4년하고도 5개월 전, 앤토니아가 18살이었을 때 나의 딸은 죽었다. 앤토니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주 지났을 때였다. 앤토니아는 끊임없는 열과 두통으로 응급실에 세 번이나 갔고, 결국 입원했다. 고통이 1부터 10까지 어떤 정도냐고 물었을 때, 앤토니아는 15라고 했다. 앤토니아는 끔찍한 의료 사고와 수막염 치료 실패로 인해 결국 사망했다. 앤토니아는 내가 사랑하는 세상이었다. 나의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

아이의 죽음은 끝없는 공허와 박탈, 그리고 고통의 사막이었다. 나는 굶고, 자해하고, 엄청난 보드카를 마셨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의 기적은 없었고, 나는 살 이유가 없었다.

앤토니아가 죽기 두달 전, 아일랜드에서. Jess Healy 제공.
앤토니아가 죽기 두달 전, 아일랜드에서. Jess Healy 제공.

2년 동안 지옥에 빠져 살며 나는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거주 치료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접수할 때, 간호사가 내게 마지막으로 자해한 게 언제인지 물었고, 나는 오늘이라고 답했다. 그전까지는, 나는 내가 하는 행동에 솔직하지 못했었다. 한번은 해변에서 친구가 내 팔에 있는 흉터를 보고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개가 물었다고 답했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는 혼돈을 멈추게 했다.

치료 프로그램 이후, 나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남자와 만났다. 그는 최근에서야 제정신이 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서로의 트라우마를 힐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내 딸은 죽었으니까. 우리 둘 다 팬데믹에 지쳐있었던 나머지, 섹스를 하고 영화를 보고 같이 잤다. 당연하게도, 일어난 후에는 아무것도 치료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메인 주의 한겨울이었다. 차갑고 칙칙한 보도블록과 팬데믹 격리는 나를 불안하고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앤토니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그 남자는 아빠가 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어두워지기 일쑤였으며, 다시 마약을 했다. 나는 마약중독자이자 조현병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그의 정신병적 행동은 내 어린 시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그와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다들 아이의 죽음 이후의 임신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임신은 잘못되었다. 나는 탁아소 비용을 감당할 만큼 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나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나는 내 딸을 되찾고 싶었지만, 이 아이는 내 딸이 아니었다.

 

내가 막막함을 느꼈을 때, 친구가 내게 선택권이 있음을 일깨워줬다.

임신 7주가 되었을 때, 나는 'Planned Parenthood'를 통해 집에서 임신중단을 했다. 나는 수술을 위해 간호사인 어머니의 집으로 갔다. 밤은 길고, 고통은 컸다. 나는 엄마의 침대에서 몸부림치다가 구토했다. 마치 앤토니아가 병원에 있던 그때처럼 말이다. 앤토니아의 엄청난 고통, 몸부림, 구토, 그리고 앤토니아를 살릴 수 없었던 나. 그게 나를 PTSD에 빠지게 했다. 고통은 잊히지 않았고, 나는 죽은 딸이 보고 싶어 울었다. 나는 진통제를 먹고, 토하고, 피를 흘렸다. 새벽 5시, 나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고통의 중단은 묘한 행복을 가져왔다. 물이 새던 나의 배는 더 이상 침몰하지 않았다. 앤토니아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고통에 비하면, 임신중단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나는 임신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몇 주 동안, 자신의 삶을 희생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의무라는 가부장적 메시지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때, 친구와 몇 시간 동안 전화하면서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이 선택은 마치 자기 구원과 같았다.

다시 밥을 먹고, 술과 남자를 끊기까지 1년이 더 걸렸다. 내 치유를 가장 우선순위로 삼기 위해, "아뇨, 난 할 수 없어요. 제 정신 건강과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임신은 절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없어요"라고 말하며 내 삶을 구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임신중단을 한 지 2년이 된 지금, 나는 고통을 잊기 위해 하던 행동들, 이를테면 남자, 보드카 등을 끊었다. 나는 딸을 잃은 엄마지만, 내 스스로를 선택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비록 아직도 조금씩 실패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앤토니아도 인정해줄 것이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에 Jess Healy가 기고한 기사를 번역, 편집했습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