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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왜 상주하면 안 돼?" 여성들의 '상주 투쟁'은 2021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장례 문화도 손볼 곳이 많다.

상주 완장과 양복을 입은 싱어송라이터 이랑.
상주 완장과 양복을 입은 싱어송라이터 이랑. ⓒ이랑씨 제공

생전에 ‘예쁘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 언니였다. 지난 10일 갑작스레 친언니를 떠나보낸 싱어송라이터 이랑(35)씨는 빈소를 ‘언니 취향’으로 꾸몄다. 유품인 화려한 댄스복을 걸어두고, 요술봉과 토끼 인형 등으로 ‘공주풍’의 제단을 차렸다.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사였던 언니는 살사 댄서이기도 하다. 이씨는 언니와 함께 내년에 열릴 대회에 나가려고 했던 ‘댄스팀 언니들’에게 “언니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제안했고, 빈소에서 음악을 틀고 춤도 췄다.

하지만 이씨가 장례를 주관하는 상주를 맡으려니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이씨가 병원 장례식장 상담실에서 “상주를 해야겠다”며 상주 양복과 완장을 요구하자 상조회사 직원은 “여자는 상주 완장을 착용할 수 없고, 머리에 핀만 꽂을 수 있다”고 답했다. 이씨는 “장례는 치러야 하니 ‘저 남자니까 그냥 옷 주세요’라고 하니까 직원이 양복과 완장을 줬다”고 말했다.

 

여자는 왜 상주하면 안 돼?

2021년에도 여전히 장례식에서 여성들은 ‘상주 투쟁’을 하곤 한다. 누나가 여럿 있는 집도 막내아들이 상주를 하고, 딸만 있는 경우엔 사위가 상주를 서는 게 ‘관례’라서다. 지난 9월 서울시 성평등문화센터 의례문화 개선 관련 공모전에서 발표된 사례를 보면,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김아무개(40)씨는 “장례 담당자에게 딸만 넷이라 큰언니가 상주하겠다고 했더니 ‘사위를 보내라고, 아니면 남자 조카라도 계시면 그분이 서는 게 모양이 좋다’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50대 장례 경험이 있는 131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상주 역할과 영정사진과 위패를 드는 역할 등 주요 역할을 남성이 맡고 있다는 응답이 약 95%에 달했다.

 

서서히 사라지는 ‘상주는 남성이 해야 한다’ 문화

대부분 장례식에서 여전히 ‘남성 상주’가 기본값이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고 있다. 여성정책연구원의 같은 조사에서도 ‘상주는 남성이 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0%였다. 다만 생전에 장례식을 어떻게 꾸릴지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다 보니,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이 찾아와도 여성은 조용히 관례를 따르며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전자음악 작곡가 윤지영(37)씨는 ‘잠깐의 언쟁’을 무릅쓰고 상주를 요구했던 점을 후회하지 않는다. 큰딸인 윤씨는 지난 9월말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상주를 하고, 영정사진도 들었다. 윤씨는 “저희 집은 딸이 둘인데, 어머니가 집안에서 유일한 남성인 제부(동생의 남편)가 자연히 상주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아버지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제가 상주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년 남성 조문객들은 윤씨를 보며 “그래도 상주는 남자가 해야 하는데…” 말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엔 저조차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생은 제외하고 ‘저와 제부’ 둘 중에 한명이 상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유학을 했던 저보다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을 더 보낸 동생이 본인이 상주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게 더 맞는 선택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성차별적인 장례문화에 대한 개선 필요성에 대해선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남성이 상주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예전보다는 없어지는 추세”라며 “성차별적인 장례문화를 발굴해 개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장사정책 및 장례문화 업무를 위탁·대행하는 한국장례문화진흥원 관계자도 “일년에 몇번씩은 ‘여자라고 왜 상주를 할 수 없느냐’, ‘외동딸인 내가 상주를 해야 하지 않느냐’ 등을 묻는 상담 전화가 온다”며 “이런 분들께 기존 장례문화에서 용기 있게 탈출해 새로운 장례문화를 개척하시라고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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