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의원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요약하면, 교육청이 마곡지구에 특수학교 관련 대체부지 요청을 했고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였'는데 교육청이 '성사 직전' 입장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 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 설득과 지역주민 갈등을 막는 등 최대한 노력을 다했음에도 특수학교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깝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교묘히 다르다.
김성태 의원은 총선을 위해 특수학교 부지를 이용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이용할 만한 여론이 뒷받침되고 나서야 정의의 사도로 나서려 한다. 잠자코 있던 나경원 의원도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 긴급간담회를 연다. 장애 아이 부모로서 마치 이제야 책임감이라도 느끼듯. 삼총사가 욕을 먹는 이유이며, 장애 아이의 부모로서 내가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있을 때만 정당한 제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사살당한 느낌이 들어서다.
장애인들이 교육 받을 권리가 당자들이 무릎 꿇고 빌어야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됨은 물론이고, 일단 저게 무슨 저 따위 '토론'씩이나 통해서 간신히 견인해내야 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토론은 뭐가 옳고 그른지, 혹은 더 나은 해법이 뭔지 따져봐야 할 때 하는 것이다. '한방병원을 지어야 하니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는 건 안 된다. 자기 동네에 장애인이 너무 많으니, 장애인들이 다른 동네로 가야 한다'와 하등 다를 거 없는 아젠다로 토론 같은 걸 붙이는 자체가 반윤리다. 약자를 배제할지 말지에 대해 다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논의해보자는 건 그 자체로 폭력이지 그걸 결코 '절차'라 불러줄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주제는 토론을 거친 투표를 통해 그 의미가 결정해서는 안 되는 주제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에서 "모든"은, 추상적 지칭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을 지칭한다.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교육권/학습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 따라서 필요한 곳에 그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짓는 것은 토론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혐오시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을 "보아라"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라" 자유를 위해 "일어서라" 앞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걷지 못하는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긍정적인 메시지와 함께 사용되는 신체 관련 언어들은 모두 비장애인들에 해당합니다. 반면 부정적인 메시지들은 장애로 연결지어 표현됩니다. 이런 식의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장애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울까요.
대학에 다니던 때 내가 억울했던 것 중 하나는 의무와 권리의 비대칭적인 구조였다.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가며 꼬박꼬박 내던 등록금 고지서에는 도서관 이용료라는 명목의 적지 않은 금액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입생들에게 일괄적으로 징수되던 교재비도 나는 예외 없이 지불했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형태의 책은 한 권도 받아보지 못했다. 주교재도 없던 내게 시험 당일 오픈북을 강요하시던 교수님도 제발 다른 수업 들으라고 통사정하시던 교수님도 분명히 내가 낸 등록금으로 월급 받아가시는 분들임에 틀림없었다.
차별과 착취가 야기하는 고통은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만 남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동료 그룹이 가질 수밖에 없는 불신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스스로를 저격한다. "강서구를 장애인 밀집지역으로 만들 수 없다", "강서구 주민 아니면 나가"라고 외친 이들은 오롯이 자신들만이 이해 당사자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외침이 무릎 꿇은 부모들에게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다. 주민토론회에서 벌어진 소란은 모든 장애인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길을 다니다 보면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반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쪽으로 와!" "거기로 가면 안돼!" "어디 가려고 나왔어?" 도움을 주려는 의도인 것을 알면서도 나름 성인으로서의 존중받을 독립적 자아를 가진 나로서는 상대의 나이와 지위에 무관하게 낯선 반말은 그다지 기분 상쾌한 일은 아니다. 나의 비현실적 동안이나 상대의 근본적 진심 따위에 상황의 긍정적 해석을 위한 최면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지팡이가 상징하는 사회적 약자의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경계는 그 반말의 타깃이 나인 줄 전혀 모른다는 척하는 유치한 결론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주민들은 김 대표가 있는 자리를 향해 삿대질하고 달려들며 "안 나가? 좋은 말할 때 나가. 지역 주민이야?"라고 소리쳤다. 교육청 직원들이 몸으로 막았으나 격양된 주민들은 직원들을 밀치며 김 대표 자리로 재차 달려들었다. 다른 주민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성을 지르며 "끌어내! 끌어내!"라고 외쳤다. 이날 자리에 대해 이은자 부대표는 "예상은 했지만 착잡하다. 장애인 싫다는 말, 막상 들으면 잘 의연해지지가 않는다"면서 터지는 울음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부대표는 "아무리 욕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다. 더 심한 모욕을 주셔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고 견딜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 특수학교인 우리학교의 교육과정과 시간표는 일반학교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통교육과정을 온전히 이수하기 때문에 국어, 영어, 수학, 체육, 미술까지도 교실 한쪽 벽에 걸린 시간표에 온전히 담겨 있다.그런데 학교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부터가 신기함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국어는 한자도 많고 분량도 많은데 어떻게 하고 수학은 그래프나 도형이 있는데 어떻게 하고 체육은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고 미술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냐는 물음을 한 가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들은 분명히 불편함을 불가능으로 강력하게 착각하게 하는 마법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미국 뉴저지 주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비장애인이 숙박을 신청했을 때 승인을 받는 비율은 75%였으나, 왜소증을 가진 경우에는 61%, 시각장애인인 경우에는 50%, 뇌병변장애인은 43%, 척추손상 장애인은 25%에 불과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 때문만은 아니라며, 대부분의 거절 사유가 '접근성 미비'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에어비앤비와 같은 사업들이 서비스를 더 많은 고객에게 확대할수록 장애인 고객에 대한 배제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