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은 작가적 신뢰와 진정성을 가늠할 때 외부인이 의존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한 작가가 쌓아올린 드로잉 선집은 완성도 여부를 떠나 작가적 신뢰에 대한 증거처럼 믿어진다. 내가 주목한 건 그가 쌓아온 드로잉의 분량이 아니라 제작일을 기록하고 과거사를 보관하는 태도였다. 이쯤 되자, '흠.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록편집증. 전적으로 제3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써나간 기록일 텐데, 그럼에도 언젠가 공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성격의 자료다.
수려한 채색과 친숙한 도상을 뒤집어쓰고 관객의 호응을 받는 MBW류의 대중미술 전시에 나는 왜 인색한 평점을 주려 할까.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블록버스터 미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 눈높이에 맞추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 관객을 알량한 왕 대접 해준 대가로, 이런 영화와 미술 전시는 거금을 벌어들인다. 상업적 대박을 꼭 비난의 이유인 양 지목할 순 없을 게다. 여기에 블록버스터 영화와 블록버스터 미술 간의 미묘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블록버스터 미술 전시는 주류 미술을 향한 대중의 위화감을 자극해서 반사이익을 얻는다.
샤를리 에브도, 홍성담, '일베 조각상' 셋을 관통하는 논점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될 가능성만으로, 어떤 표현이 제약될 수 있느냐'이다. 물리적인 상해나 인명 피해가 아닌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 받을 가능성만으로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품은 예술 표현이 제약되어야 하냐는 게 관건이다. 요컨대 산 동물을 학대하거나 제 3자에게 물리적인 해악을 끼치는 걸 작품의 콘셉트로 포함시킨 작품이 있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를 논할 필요 없이 사법적 관리 대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군가 불쾌하게 생각할 여지'만으로 예술 표현이 제약될 수 있느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