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eungjun

나의 감정이 메마르고 내 삶의 짜릿함이 점점 줄어가는 것은 어쩌면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얻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얌전하게 커버가 씌워져 있는 작은 차 옆에는 누가 봐도 값비싸 보이는 외제차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다. 길거리의 오뎅국물 하나에 행복해 하는 아이들 곁에는 이 동네에는 왜 이렇게 맛난 음식점이 없냐며 투덜대는 어른들이 걸어간다.
대학에 다니던 때 내가 억울했던 것 중 하나는 의무와 권리의 비대칭적인 구조였다.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가며 꼬박꼬박 내던 등록금 고지서에는 도서관 이용료라는 명목의 적지 않은 금액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입생들에게 일괄적으로 징수되던 교재비도 나는 예외 없이 지불했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형태의 책은 한 권도 받아보지 못했다. 주교재도 없던 내게 시험 당일 오픈북을 강요하시던 교수님도 제발 다른 수업 들으라고 통사정하시던 교수님도 분명히 내가 낸 등록금으로 월급 받아가시는 분들임에 틀림없었다.
남들과 다른 부족함이 장애라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비교해서 꽤 많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새들처럼 날지도 못하고 치타처럼 달리지도 못한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 모두는 비행장애이고 지체장애인 것이다. 사람들은 과학기술이라 말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비행기나 자동차는 동물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휠체어나 아주 빠른 전동휠체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맘에 들지 않는 지점도 있는데 바로 그들의 단언하는 태도이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고 나만 잘 따라하고 내 이야기대로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는 자신에 찬 목소리는 언젠가 야시장에서 보았던 약장수 아저씨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가 1만 시간 스케이트를 타도 김연아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서 몇 안되고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한다 해도 세계적인 모델의 수는 여전히 아주 적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씩 저녁바람이 선선해 가는 요즘 올해의 프로야구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다. 문득 올해의 성적을 돌아보며 조금은 객관적인 관전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그 전체의 판도도 들여다 보고 상대팀의 멋진 선수들도 응원하면서 조금 더 성숙한 야구팬이 되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물론 팬심마저 접을 수는 없지만 다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과도 서로 사실을 인정하고 격려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잔을 비워야만 했던 그때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주량경쟁의 무대로 착각하게 된 것 같다. 물론 그때도 맘 깊은 고민 이야기도 애잔한 사랑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오늘은 누가 최후의 생존자인지 나의 주량은 몇 병의 소주로 신기록이 세워졌는지를 논하다 보면 소중한 밤들은 끊겨진 필름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기억의 세계로 봉인되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살다보면 나의 20대 술자리들처럼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열심히만 외치면서 달리는 경우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을 보는 관점 중 하나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악기연주를 엄청나게 잘하거나 보지 않고도 길을 찾고 뭔가 특별한 것을 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오해일 뿐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 중에도 천재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절대음감 가진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그냥 악기를 잘하는데 눈이 안 보이는 것이다. 시력의 부재와 음악성과의 상관이 있다고 말하기엔 우리 학교의 적지 않은 음치 아이들이 걸린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꼬마들의 꿈 이야기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는데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가장 큰 문제는 그 녀석들의 온전치 않은 시력이다. "의사는 제 시력으로 할 수 있을까요?" "일반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 있을까요?" "미대에 진학할 수 있을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녀석들이 나를 찾아올 때쯤이면 이미 현재의 지구상에서는 그런 일들은 시력 없이 해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자기결론을 내린 뒤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마음은 아프지만 하소연과 위로 몇 마디가 오가면 그럭저럭 씁쓸한 마무리에는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한 녀석의 고민은 조금 더 특별했고, 그 의지도 너무 강력했다.
사람들은 눈이 안 보이는 이들의 생활과 삶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봉사를 자처한 착한 이들에게조차도 학생들은 도움의 대상 혹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이들로 살짝 왜곡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쁘거나 틀린 것이라기보다는 자주 접하지 못한 상대에 대한 당연한 모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짝꿍들은 2박3일 혹은 두세 번의 수련회를 거치면서 신혼부부에서 오래된 부부로 또 오랜 친구와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과의 관계를 바꾸어 나간다.
급히 테이크 아웃을 선택하는 사람들과 몇 시간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동등한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혹시 보편적 복지의 모델은 아닐까? 테이크 아웃을 선택한 사람들이 당장의 높은 지불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 것은 시간적 상황과 욕구의 변화에 의해 얼마든지 역할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도 몇 가지 문제점은 보이는데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혼자서 독점하고 타인의 불편함을 유발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내겐 규칙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복지의 독점 혹은 부정수급의 사례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