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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4일 08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4일 14시 12분 KST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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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게시판에 강연 공지가 떴다. 갈까 말까 하다 가기로 결정했다. 아는 강사 때문이었다. W는 무려 6년 만에 봤다. 강연이 끝난 후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난 밥이나 먹자 했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W가 에디터로 일하는 허핑턴포스트로 옮겨갔다.

질문은 주로 내가 끌고 갔지만, W도 틈틈이 실용적인 질문을 던졌다. "블로거로 활동해보는 게 어때요?" 질문 보단 강한 권유에 가까웠다. 몇 차례 완곡히 거절하다 결국엔 흐리멍덩하게 약속을 했다. 한 마디로 낚인 거다. 내가 허핑턴에 글을 쓴 건 밥 때문이다.

글을 쓸 생각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을 뿐, 메모장에 뭔가를 끼적거리던 게 일 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다. 쓰면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쓴 게 아니라 오히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한 거니까. 지금은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W가 고맙다.

예상보다는 첫 글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도 했고, 출판 제안도, 강연 요청도 있었다.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데서 일어났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자발적으로 글을 올릴까? 이미 알려진 대로 허핑턴의 제1 성공요인은 '자발적 블로거'들의 참여다. 그들이 보통의 잡지와는 사뭇 다른 콘텐츠들을 생산해 낸다. 그들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 쓰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됐다. 경험하기 전의 추측과 경험한 후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그 힘은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매슬로(1908~1970)가 말한 인정욕구 혹은 자기실현욕구에서 나왔다.

이 아이디어는 당시 표류하고 있던 나의 프로젝트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인간의 상위 욕구는 돈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실제 11월에 나오게 될 'EBS육아학교' 앱 서비스에는 허핑턴 정신이 강하게 깔려 있다.

밥의 힘

밥 먹다가 우연한 기회를 만든 사람들은 많다. 값을 따질 수 없는 통찰,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친구 관계, 크고 작은 배움이 종종 밥 먹다가 일어난다. 정확한 집계를 낼 수 없지만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다. 사람들은 기회가 생긴 이유를 밥이 아닌 만난 사람에서 찾기 때문에 추측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게의 시작은 밥이다. 생각해보자. 누구랑 대화를 하던 밥 먹는 자리가 아니라면 어디서 한 시간 동안 편안하게 얘기를 할 수 있는가.

물론 차를 마실 수도 있다. 같이 걸을 수도 있다. 그 밖에 기타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압권은 역시 밥이다. 가장 큰 이유는 만만하다는 점. 밥 먹자는 제안은 차를 한잔 하자고 할 때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편안하다. '차 한 잔 하자'고 하면 무언가의 숨은 목적이 엿보이는 반면, 밥에서는 그게 잘 안 보인다. 문화적으로 볼 때 밥 먹는 자리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상호 양해가 전제되어 있는 거다.

밥상이 있으면 말하기가 훨씬 편해진다. 차를 마시는 카페에 비해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할 일이 있다. 주문 전에 물을 따르고 냅킨을 펼치고 숟가락을 놓고 메뉴판을 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식사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잡담을 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진입한다.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잡담이 시작되며 곧잘 놀이로 전이된다. 실제로도 잡담은 놀이의 속성과 상당히 유사하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는다. 목표보다 과정 중심적이며 그 자체로도 즐겁다. 밥 먹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갈 법한 한 마디에 꽂히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뇌가 충분히 이완되어 있는 상태, 바로 창의력의 토양이다.

밥은 만남이다

살면서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 중에 하나가 '언제' 밥 한번 먹자일 거다. 성인이 되어 이 말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대부분 빈말이란 걸 알기 때문에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밥 먹는 게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면 그렇게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다음 주 시간 돼?" 언젠가 연배가 한참 위인 L선배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네, 그럼요!" 아주 가깝지는 않은 선배의 급작스런 제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근사한 카페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선배가 밥을 사겠다고 하는 특별한 목적은 딱히 없었다. 근황을 묻고 가벼운 일상의 얘기를 한 게 전부였다. 시작은 다소 어색했지만 잡담의 힘은 1시간 만에 확인되었다. 일상적으로 인사하던 선배가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으니까.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말이 있다. "오십이 넘으니까 말이야 때론 받는 것도 배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전에는 주는 것만 배려라고 생각했지." 선배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소중한 교훈을 전혀 힘주지 않고 새겨 주고 있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경험이었다. 밥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는 핑계에 밥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함께 밥을 많이 먹을수록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남는 건 진짜 밥을 먹는 일이다.

빈말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약속을 잡아야 한다. 계획은 액션이 전제되어야 완성된다. 밥 한번 먹자는 말 앞에 '다음주에'라는 말을 붙여보자. 이렇게 되면 이건 꼭 해야 되는 일이 된다. 혹은 밥 한번 먹자는 말 다음에 '내가 살게'를 붙여보면 어떤가. 효과는 더 강력하다. 제안하는 주체가 후배라면 이건 백프로다. 상대방은 그 순간 일정 체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강력한 액션 플랜은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을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언제'를 오늘로 앞당기는 법

다양한 사람들과 밥을 자주 먹는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는 자기가 먼저 제안한다. 얼핏 단순한 원리 같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밥 먹자'고 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용기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는 논외로 치자) 길가다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도 안 해보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번이 중요하다. 한 번 하면 두 번 할 수 있고, 차츰 큰 정신적 수고 없이 툭툭 던질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의 저자이자 와튼스쿨 최고의 강의로 정평이 나 있는 스튜어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아이디어를 참조해 볼 만하다. 그는 학기 첫 강의에서 언제나 같은 과제를 내준다. 매장에서 '무조건' 할인 혜택을 받는 것. 구매 아이템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뭔가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학생들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적절한 방법을 터득해 간다. 그러면서 어떤 거래든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일이 한 번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성장이 곧 성공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토크계의 전설 래리 킹도 유년 시절에는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첫 디제이를 맡았을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없이 음악의 볼륨만 높였다 낮추는 일을 세 번이나 반복하기도 했다. 방법은 연습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아파서 결근을 할 때는 그 일을 자청할 정도로 말하기에 매달렸다.

최고가 된 후 그가 사람들에게 즐겨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바지를 입을 때 한 번에 한쪽씩밖에 못 입습니다." 한번 씩 하면서 수정하라는 말이다. 무엇이든 많이 할수록 더 잘하게 되고 재미를 느끼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누군가와 밥 한번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다보면 어색함은 차츰 익숙함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가 생긴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어보자. 그 순간부터 놀라운 일이 생긴다. 심리적 변화의 시작은 눈치조차 챌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뭔가 달라도 달라진다.

가령, 당신은 어색함을 돌파하기 위해 뭐라도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뭐라도 듣게 될 것이고, 뭐라도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선? 밥의 힘을 확인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