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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1일 05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11일 14시 12분 KST

[공짜 영어 스쿨] 셀프 영어 몰입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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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25. 셀프 영어 몰입 캠프

대학 시절 꿈이 유학이었다. 나는 군인들이 대통령을 하는 한국이란 나라가 싫었고, 적성에 맞지 않는 공대라는 전공도 싫었고, 내 의사를 존중해주지 않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도 싫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최고의 길이 유학이었다. 그런데, 유학이 쉽지 않더라. 대학원으로 유학을 가자니 학부 성적이 딸리고 (2.0 수준^^) 전공을 바꾸자니 학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비용이 감당이 안 됐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유학은 포기하는 게 맞았다. 아, 유학이라도 가야 영어를 잘 하게 될 텐데.

잠깐, 영어 공부하려고 유학 가나? 영어는 한국에서도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미국인 양 생활하면 그게 유학 아닌가?

학기 중에는 수업도 듣고 과제도 내고 이래저래 시간 관리가 힘들다. 하지만 방학은 마음 먹기에 따라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쓸 수 있다. 방학 동안 미국에 단기 유학왔다고 생각하고 매일을 살아보면 어떨까? 그래서 시작했다 셀프 유학 캠프.

아침에 눈을 뜨면 AFKN 뉴스를 튼다. 청계천에 가서 고물 흑백 티비를 중고로 3만원주고 샀다. 하숙방에 TV 있는 사람이 나뿐이니까, 무슨 경기 중계가 있는 날엔 내 방으로 몰려오더라. AFKN에 고정해놓고 채널을 뻰치로 뽑아버렸다. 아예 다른 채널은 못 틀게. 다들 독한 놈이라고 욕을 하더라. 상관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온 유학생이다. 저들은 영어를 못하는 다른 나라 유학생이고.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 갈 때는 그날 외워야 할 회화 표현을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적어놓고 그걸 보며 중얼중얼 외우면서 갔다. 10번 정도 읽으면 그 다음엔 보지 않고도 읊을 수 있다. 하루 중에도 틈만 나면 중얼중얼 문장을 외운다. 다들 나를 미친 놈 보듯 한다. 상관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온 가난한 고학생이다. 미국까지 타고 온 비행기 값의 본전을 뽑으려면 독하게 공부해야 한다.

도서관에 앉아 영어 단권화 작업을 했다. 교재를 보며 빡세게 공부한다. 아, 힘들다. 이렇게 힘들 때는 쉬어야 한다. 미녀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도서관 뒤편 으슥한 곳으로 데이트하러 간다. 아이와 AIWA (추억의 일제 카세트 플레이어) 녹음기를 꺼내 이어폰을 꽂고 테이프를 재생한다. 아침 내내 걸어오면서 외운 그날의 회화가 들려온다. 여자 성우의 말에 마치 내가 상대인 양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책은 보지 않고 원어민의 발음에만 집중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때론 여자 역할을 하며 그녀의 말도 흉내 내 본다. 지나가던 커플이 미친놈인 양 쳐다본다. 상관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온 가난한 고학생이다. 비싼 미국 생활비의 본전을 뽑으려면 독하게 공부해야 한다.

점심 먹고 나면 나른하고 피곤하다. 쉬어야 하겠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꺼내든다. 용산 미군 기지 옆 헌책방에 가서 2000원 주고 사온 영문 페이퍼백이다. 당시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지만 모든 작품이 다 흥미진진해서 영어 직독직해를 연습하기에 최고의 텍스트다. (지금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강추! 영어덜트 소설이 쉽게 더 술술 읽힌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몰입해서 읽다보면 머리가 쭈뼛쭈뼛 서면서 잠이 확 달아난다. 사전은 절대 보지 않는다. 영문 소설을 읽으며 사전을 찾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 모르는 단어는 그냥 넘어간다. 상황상 대충 어떤 표현인지 짐작해본다. 반복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옆 메모지에 적어 둔다. 나중에 찾아본다. 남들은 고시 공부하느라 온갖 법학 개론을 쌓아놓고 공부하지만 나는 자리에 딸랑 영문 페이퍼백 한 권 갖다놓고 하루를 보낸다. 재수없다고 흉봐도 상관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온 유학생이다. 미국에서 미국 소설 읽는 게 뭐가 이상해.

오후 3시, 독해와 영작을 공부할 시간이다. 자료실에서 빌려온 타임지를 꺼낸다. 맨 뒷장 사설을 펼쳐놓고, 번역을 시작한다. 번역이 끝나면 나가서 잠시 쉰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설을 소리내어 읽는다. 마치 뉴스 앵커인 양 크고 유창한 발음을 흉내 내면서. 누가 쳐다봐도 할 수 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온 유학생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기에 더 독하게 공부하는 중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타임지는 덮고, 내가 번역한 한글 문장을 보면서 영작을 시작한다. 분명 1시간 전에 번역할 때 원문을 들고 끙끙거렸기에 다 본 문장인데, 소리 내어 몇번씩 읽은 문장인데도 원문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열심히 영작을 시도한다. 끝난 후에 원문과 맞춰본다. 아, 여기서 정관사가 또 빠졌네. 이 단어가 왜 그리 생각이 안 나지? 기억나지 않은 단어는 따로 단어장에 적어둔다. 며칠간 집중 공략 대상이다.

힘든 공부가 끝났으니 하숙집에 가서 저녁 먹고 좀 쉬어야겠다. 저녁 먹을 땐 옆에 페이퍼백 소설을 펼쳐놓고 뒷부분을 이어 읽는다. 괜히 다른 친구들이랑 대화를 나누면 영어 몰입 모드가 깨진다. 철저하게 영어만 접하며 하루를 보낸다. 식사가 끝나면 방으로 와서 TV를 튼다. 저녁 7시면 AFKN에서 항상 시트콤을 한다. 새로 시작한 '프렌즈'라는 시트콤이 은근히 재미있네. 한국에는 왜 저런 시트콤이 없을까? 젊은 애들끼리 연애하는 이야기. 한국에서 누가 저런 거 만들면 대박날 텐데. 챈들러의 한마디에 방청객이 웃음을 터뜨린다. 챈들러의 유머는 참 어렵단 말이지. 나는 못 알아듣는데, 지들끼리 웃으니까 자존심 상한다. 그래, 아직도 리스닝이 약하군. 다시 도서관에 가는 길에는 방금 녹음해둔 '프렌즈'를 다시 들으면서 간다. 무슨 말이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웃었을까? TV 소리를 녹음한 거라 음질이 좋지 않다. 들리지 않는 부분은 들릴 때까지 끈질기게 리와인드 해본다. 알고 보니 내가 아는 단어다. 길에 서서 문득 이마를 친다. 아, 이 단어를 미국애들은 이렇게 발음하는구나. 무슨 큰 건 해낸 양 의기양양하다. 갑자기 마구 기쁘다. 앗싸! 하면서 혼자 주먹을 불끈 쥔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할 수 없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온 유학생이다.

도서관 앞에 고교 동창회 모임 안내 포스터가 붙어있다. 지나가던 동창을 만났다. "야, 방학 때 울산에 안 내려간 친구들끼리 모여서 한잔 하자는데, 너도 올 거지?" 씩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미안, 바빠서." 속으로는 "I am sorry, but I am busy." ^^ "자슥아, 암만 바빠도 친구들 얼굴은 한 번씩 봐야지." 그냥 웃으며 지나친다. 친구는 무슨, 나는 미국에 유학 온 유학생이다. 한국 유학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 유학생들이랑 어울릴 거면 그냥 한국에 있지, 비싼 학비 내고 미국까지 뭐 하러 오나? 남들한테는 좀 못해도 된다. 나한테 잘 하자. 나라도, 학교도, 집도. 환경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다. 나의 삶, 나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살자.

방학이 끝났다. 2달 동안 영어만 미친듯이 팠더니, 영어가 미친듯이 늘었다. 아, 정말 뿌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정산. 내가 아낀 돈이 얼마인지 한번 보자. 미국 가는 비행기값, 미국 대학 등록금, 미국 생활비, 그대로 남았다. 와, 방학 동안 돈 많이 벌었네! 정말 뿌듯하다. 짠돌이 셀프 몰입 영어 캠프, 완전 남는 장사다.

이제 대학생들에게는 겨울 방학이다.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보시라, 셀프 영어 몰입 캠프, 뜻이 없지, 길이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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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늘은 이곳 아르헨티나 시간으로 제 마흔여덟번째 생일입니다.

생일 자축 이벤트로, 스카이다이빙을 했습니다.

비용은 20만원 정도입니다. 생일 선물로 제 자신에게 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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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행기 타고 날아올라 시속 200킬로 속도로 45초간 자유낙하했어요.

완전 죽입니다. (죽지는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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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 넘버 2 미션 , 클리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하고 삽니다.

제 인생은, 대학 시절 지독하게 영어를 독학으로 정복한 내 자신에 선물한 거니까요.

인생, 뭐 있나요. 즐기다 가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독해질 때는 좀 독하게 살 필요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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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