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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7일 06시 5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7일 14시 12분 KST

[공짜 영어 스쿨] 리스닝의 즉효약, 받아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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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짜 영어 스쿨 오리지날 버전입니다. 본격적인 리부트에 앞서 오리지날 먼저 올립니다. 2008년 '나의 영어 공부 이력서'란 책에 쓴 글입니다.


[공짜 영어 스쿨] 7. 독학으로 영어 고수가 되는 비법 1) 리스닝의 즉효약, 받아쓰기

무협 영화를 보면서 흔히 해 보는 상상이 있다. 필부의 삶을 살던 나, 어느 날 사라졌다가 몇 년 후 홀연히 나타난다. 경천동지할 무공을 자랑하는 절세 고수가 되어 혈투가 난무하던 중원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가져온다. '소림사 주방장' 같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영어에 있어 난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89년 봄, 난 대학을 다니다 휴학하고 방위병으로 입소했다. 수백명의 신병들이 모이는 신병 훈련소에서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생활을 하며 난 자괴감을 느꼈다. '이렇게 군복을 입혀 놓으니 난 정말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못난 녀석이구나.' 아마 신병 훈련소 생활을 해 본 많은 남자들이 느꼈던 일일 것이다. 그때 훈련소를 나오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특기 하나를 만들자. 100명을 줄지어 세웠을 때, 내가 다른 99명보다 잘하는 하나를 만들어 보자. 그래, 무림 영어계의 고수가 되자. 그런 각오로 방위병 생활을 하며 퇴근 후에는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세상을 등지고 홀로 무공 수련에 힘쓴 지 18개월, 난 어느새 벽안 무사들의 대화를 들으면 그들의 속내를 이내 알아챘고, 그들의 무림 비급을 읽으면 그 뜻이 눈앞에 무릉도첩인 양 펼쳐졌으며, 입을 열면 생생한 영어 문장이 튀어 나와 적들이 혼비백산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 청취와 독해, 회화 3박자를 고루 갖춘 고수가 된 것이다. 독학으로 익힌 나의 영어 신공이 강호에서도 통할 것인가? 전국의 이름난 강호들과 일합을 겨뤄 보기 위해 비무대회에 나갔다. 과연?

18개월의 방위 근무를 마치고 1991년 복학한 나는 그해 봄 경희 대학교 국제평화대학원이 주최한 제2회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갔다. 1부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영어 연설로 주제 발표를 하고, 2부는 주제에 대해 영어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형식의 대회였다. 흔히 하는 영어 경시대회, 즉 영어 청취와 독해로 문제를 푸는 방식이 아니라 말하기와 쓰기로 실력을 겨루는, 영어 실전 고수를 뽑는 전국 비무 대회였다. 그 대회에서 대상을 탄 고수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특례입학한 외교관 자녀였다. 비록 미국에서 10년을 살다 온 그 친구가 날린 장풍에 밀리긴 했지만,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대학생들과 겨룬 결선대회에서 난 2등상을 탔다. 18개월 동안 내가 혼자 해 온 영어 공부의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게 경천동지할 무공을 안겨다 준 영어 공부의 비급을 소개하겠다.


리스닝의 즉효약, 받아쓰기

영어 독학을 시작하며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친구에게 빌린 영어 회화 테이프를 듣고 내용을 받아적은 것이었다. 나의 대학 시절에는 영어를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고가의 회화 테이프였다. 80년대 말 당시 물경 50만원이 넘어가는 그 테이프 한 질을 살 돈이 없어, 군대 가는 친구에게 '3년 동안 내가 테이프 보관해줄게.'하고는 얻어왔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영어 자료를 듣기 위해 단파 라디오를 사서 VOA(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듣기도 하고, AFKN FM 라디오에서 나오는 AP Network News를 청취하려고 매시 정각마다 라디오를 끼고 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요즘 시절은 얼마나 좋은지... 마음만 먹으면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영어 자료 구하기는 너무 쉽다.

사실 영어 공부의 관건이 더이상 자료의 유무가 아니다. 학습 의욕이 떨어지거나 성취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교재로 회화를 공부하려는 이들의 경우, 시작은 좋다. 일단 만만하니까. 어느 교재나 초반은, Good morning, how are you?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다. 그러나 비싼 교재일수록 뒤로 가면 심하게 어렵다. 비즈니스 실용 회화가 나오니까. 물론 책을 사고 처음에 한번 죽 훑어보면 흐뭇하다. '이것만 다 떼면 요런 고급 회화도 가능해진다는 거지?' 김칫국 심하게 드시는 거다. 그냥 대충 듣고 넘어가는 학습법으로는 절대 고급 회화까지 못 간다.

책을 보며 테이프를 들으면 다 이해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들리는 단어만 들리고 안 들리는 단어는 죽어도 안 들린다. '초급 회화 정도는 다 알아듣지!' 장담하시는 분. 책을 덮고 받아쓰기를 해 보시라. 무슨 뜻인지 아는 문장인데도 받아쓰려고 보면 의외로 안 들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럴 때 단어 하나가 안 들린다고 금세 포기하고 바로 책을 펼치지 마라. 소리만으로 철자를 유추해 가며 사전을 뒤져보라. 영어는 발음기호로 된 표음문자이기에 아무리 어려운 단어라도 끈기 있게 철자를 조합해 보면 결국 알아낼 수 있다.

받아쓰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머릿속에 있는 국산 영어와의 결별을 위해서다. 우유 한 잔, 그러니까 glass of milk를 난 늘 '글래스 오브 밀크'라고 읽었다. 하지만 받아쓰기를 해 보면 원어민 발음은 '글래써 미역'처럼 들린다. "그랬어, 미역?"

파래도 아니고 미역한테 시비거는 거냐? 처음엔 난 이런 단순한 문장도 받아쓸 수 없었다. 경험을 통해 차츰차츰 영어에서 단어 끝에 오는 자음은 소리가 죽고, 자음 앞에 있는 L은 묵음이 된다는 걸 익혔다. 이건 문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글래써 미역'을 듣고 glass of milk를 찾아가는 과정. 이런 받아쓰기 공부는 결국 내 머릿속 국산 영어와 이별하고 원어민 영어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다.

물론 이 학습법이 고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회화 교재를 들으며 독학을 하는 이들 대부분이 초급에서는 진도가 술술 나가다가 중급이나 고급 회화에 이르러 학습 효율과 의욕이 현저히 떨어져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초급에서 안 들리는 단어를 문장 뜻 안다고 대충 넘어가면, 결국 중급이나 고급에 가서 벽에 부딪힌다. 안 들리는 단어, 쉽게 포기하지 말고 물고 늘어져야 한다. 받아쓰기, 영어 청취력 향상을 위해 고생스러우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하다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어학 실력이 생각만큼 쑥쑥 늘지 않기 때문이다. 어학 실력은 절대로 직선을 그리며 상승하지 않는다. X축에 시간을 들인 만큼 Y축의 실력도 정비례해 올라가야 흥이 나는데, 어학은 사선이 아니라 계단형을 그리며 올라간다. 아무리 공부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하지만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문득 계단을 올라서듯 한 단계 훌쩍 상승하는게 어학 실력이다. 영어 고수가 되는 사람은 대개 그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순간, '이거구나!'하는 희열을 맛보고 어학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으면 금세 포기하고 만다. 조금만 더 가면 계단을 만나 훌쩍 넘어서는 순간이 오는데도 말이다. 첫 번째 계단까지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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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