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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22일 12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22일 14시 12분 KST

할아버지 라이더의 파란만장한 인생

어쩌다보니 시리즈로 글을 쓰고 있네요. 한 달 전 연출하던 드라마 종영을 앞두고, 촬영이 끝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하다, 나의 20대에 가장 즐거운 추억이었던, 자전거 전국일주가 떠올랐어요. 그래, 자전거 여행을 떠나자!

- 인생은 20대에 만들어지는구나

그래서 주말에 춘천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납니다.

- 춘천 자전거 여행

그러다 길에서 정말 멋진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난 거죠.

- 할아버지 라이더의 여행 예찬

오늘은 설빙에서 빙수 먹으면서 들은 그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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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원래 체코 사람이랍니다. 68년 체코 민주화 운동 시기에 '프라하의 봄'을 이끄는 대학생 지도자 중 한 명이었대요. 그러던 어느 날 체코 국경에 소련군 탱크가 진주하고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친구가 달려와서 그러는 거예요. 얼른 몸을 피하라고. 짐을 쌀 것도 없이 작은 가방 하나 들고 기차에 오릅니다. 당시 건축학과 대학생이었는데,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건축학회 세미나 참가 예정이었기에 일단 오슬로로 향합니다.

국경을 빠져나오고 며칠 후에 프라하에 소련군 탱크가 들이닥칩니다.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은 잡혀서 감옥으로 갔고요. 국경이 폐쇄되었지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체코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답니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학생 중 한 명이라 귀국하면 바로 정치범 신세가 될 테니까요. 노르웨이 정부에서 정치 난민 자격을 주겠다고 합니다. 한편 미국 정부에서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난민 지위를 제공하겠다고 했고요. 할아버지는 두 나라 중에서 피난처로 미국을 선택합니다. 영어는 조금 했지만, 노르웨이어는 전혀 할 줄 몰라서 미국이 더 편할 것 같았다고요.

미국에 와서 건축 공부를 마치고, 건축설계사로 일을 시작합니다. 1970년대 미국 경제의 활황기에 쇼핑몰이며, 회사 건물이며, 아파트며 온갖 건축 설계를 다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이 질리더랍니다. 내가 평생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처럼 일하자고 고국을 탈출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자전거를 타고 훌훌 남미로, 인도로, 세계 각국으로. 그리고 그 자전거 여행을 책으로 옮기는 작가의 삶을 살게 된 겁니다.

문득 이 대목에서 궁금해졌어요. 일년에 몇달씩 여행을 떠나는데 혹시 집에서는 반응이 어떨까? 네, 이 분, 정말 자유롭게 사셨더군요. 나이 오십이 되도록 싱글로 살았답니다. 그러다 어느날 베트남 자전거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현지 처녀를 만나 결혼했대요. 지금은 대학에 진학하는 아들을 거기서 얻은 거죠.

그 아들이 이번에 체코에 있는 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한답니다.

"왜 미국에 있는 대학에 안 보내고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들 난리야. 대학 졸업장 받아서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굽는다니까. 차라리 유럽이 낫지."

할아버지는 지금 다시 68년의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미국과 노르웨이 중에서 노르웨이를 선택하겠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본인이 처음 난민으로 도착한 미국과 지금의 미국은 달라졌다고요. 부시 행정부 이후로, 미국의 시스템 어딘가 망가진 것 같다고. 여기나 거기나, 참... 할아버지는 여행을 다녀보고 나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답니다. 미국만 해도 신자유주의 이래, 경쟁으로 삶이 피폐해졌지만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그래도 기본적인 인간의 행복은 보장해준다고 하네요. 한국을 뜨려는 분들이 주위에 많은데, 이민 가실 분들, 참고하세요. 미국보다는 북유럽이랍니다. ^^

저는 할아버지의 멋진 인생 모험담을 듣고 나서, 이해하게 되었어요. 춘천가는 자전거 길에서 할아버지의 꽁무니를 쫓아가며 정말 신기해 했거든요. 어떻게 나이 70이 다되어서 처음 가보는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에 자전거 한 대 끌고 와서 텐트에서 노숙하면서 전국 일주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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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프라하에서 소련군 탱크를 피해 기차 타고 달아나던 밤, 할아버지의 짐은 정말 단출했답니다. 그리고 맨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지요.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노력합니다. 삶에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그런 물건들로 우리의 인생을 옭아맵니다.

할아버지는 그냥 아는 거예요. 인생을 즐겁게 사는데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도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자전거에 텐트 싣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겁니다.

할아버지의 멋진 인생에서 배웁니다. '언제든 비울 수 있는 삶.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