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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7일 05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8일 14시 12분 KST

긴 인생을 즐기며 사는 법

STILLFX via Getty Images

1996년 MBC 예능국에 입사한 저는 "한국판 청춘 시트콤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그래? 어디 한번 마음껏 해봐" 하고 기회를 주더군요. 2000년 가을에 〈논스톱〉 시리즈를 맡았고, 쉬지 않고 질리도록 만들었어요. 그게 끝나자 〈뉴 논스톱〉까지, 말 그대로 논스톱으로요. 〈뉴 논스톱〉이 끝나서 좀 쉴까 했더니, 신인 배우들 새로 뽑아서 〈논스톱 3〉을 만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2년 반 동안 만든 에피소드가 500편이 넘습니다.

자신감을 얻어 새로운 시트콤을 기획했습니다. 〈조선에서 왔소이다〉라는 제목의 타임머신 판 '왕자와 거지' 이야기였어요. 조선 시대 한량 양반과 그의 부지런한 종놈이 우리가 사는 현재로 와서 거지와 부자로 서로 입장이 바뀌어가는 스토리였죠. SF 시트콤은 시기상조라고 주위에서 다들 말렸지만, 저는 투지를 불태우며 기세 좋게 덤볐지요. 하지만 그 타임 리프(시간 이동) 시트콤은 시간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망했습니다. '시청률 저조, 제작비 초과, 광고 판매 부진' 등 연출가가 저질러선 안 되는 삼거지악의 죄를 짓고 방송 4부 만에 종방 결정이 내려져 7부에 막을 내렸어요.

조기 종영이 되고 보니 너무 창피했어요. 밖에 다니기도 힘들어 한동안 집구석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하루는 MBC 예능국 선배이신 송창의 국장님이 술 한잔하자고 홍대로 부르셨어요. 기가 죽어 고개 푹 숙이고 술잔만 비우는데, 그러시더군요.

"프로그램 망해서 쪽팔려 죽겠지?"

간신히 "예" 하고 대답했어요.

"난 말이야. 네가 이번에 망한 게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어요.

선배님이 잔에 술을 따르며 물어보셨어요.

"민식아, 올해 나이가 몇이냐?"

"서른다섯입니다."

"캬아! 좋을 때다. 프로그램 말아먹기 참 좋은 나이로구나."

좀 너무하신다는 생각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어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가 언제 같으냐?"

"스무 살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 나이 스물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고, 나이 서른은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줄 아는 게 없어. 남자는 나이 마흔은 되어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온단다. 넌 아직 전성기가 오려면 멀었어."

저는 가만히 탁자 모서리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네가 만약 이번 프로그램도 대박 냈다고 해봐. 스타 PD라고 우쭐해서 자만하게 됐을걸? 연출이 자만하는 순간, 대중은 등을 돌린다. 또, 내내 잘나가다가 나이 사십이나 오십 넘어 망해봐라. 회복하기 힘들어. 망하는 것도 다시 설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경험해야 해. 그런 점에서 망하기에 딱 좋은 나이가 삼십대야. 진짜 인생의 전성기를 준비하는 시기거든."

선배님 말씀이 그때는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 그보다 더 고마운 충고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더욱이 100세 인생을 이야기하는 세상이니, 새로운 시도는 언제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제는 공부고 놀이고 간에 나이 제한이 없어졌잖아요.

가끔 제 블로그 연애 스쿨에 이런 고민 상담이 올라옵니다.

"아직 20대인데, 부모님이 좋은 사람 만나서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입니다. 취업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좀더 시간을 갖고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들은 평균 수명이 60이던 시절을 살았어요. 60에 죽는다는 건, 자식이 30대일 때 세상을 떠난다는 거지요. 그런 시대에는 자식이 20대에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직장에서 자리 잡는 걸 봐야 죽을 때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90세, 100세까지 사는 인생이에요. 전혀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가 하나인데, 부모가 죽고 나서 혼자 외로울까 봐 걱정이라는 친구가 있어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야, 요즘은 부모가 90에 죽으면 자식도 나이가 60이야. 그 나이에 외로우면, 지가 인생을 잘못 산 거지, 어찌 형제를 낳아주지 않은 부모 탓이겠냐?"

예전에는 중매로 만나 잘 맞지 않는 부부라도 그냥저냥 살았어요. 남편은 일하느라 바쁘고 아내는 애 키우느라 바쁘게 살았죠. 남편이 50대 중반에 퇴직하고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그제야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좀 있었어요. 그 시간이 길지가 않아요. 평균 수명이 짧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부부가 싸운다 해도 몇 년 안 싸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90까지 삽니다. 퇴직하고 아이 다 키워놓고 부부 둘이 덩그러니 30년을 살아요. 마음에 안 맞는 사람과 불행하게 살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지요.

직업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 세대는 취업할 때 적성 같은 걸 따져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그냥 힘들어도 다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나이 50에 퇴직하고 노는 시대가 아닙니다. 100세 시대에는 오래 일할 수 있어야 노후가 행복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마음에 맞는 일,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찾는 게 우선입니다. 서른 살 넘어 취직 못 하고, 결혼 안 했다고 절대 불안해할 이유가 없어요.

100세 시대, 인생을 좀더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10대 20대에 공부하고, 30대 40대에 일하고, 50대 60대에 놀다가 간다.'

이렇게 20년씩 딱딱 끊어서 인생의 단계를 나눌 수 없어요. 100세까지 사는 인생이므로 나이 칠팔십에도 일을 해야 하고, 오륙십에도 공부를 새로 해야 합니다. 일과 공부와 놀이가 돌고 도는 순환의 삶을 사는 시대거든요.

이제 공부에는 정해진 나이가 따로 없습니다. '이번이 내 인생에 마지막 영어 공부다' 하고 마음먹자고요. 공부에 어떻게 마지막이 있을 수 있겠는가만,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한 번 더 도전하겠다는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나이 들어서 다시 하는 영어 공부에는 장점도 많습니다.

첫째, 큰돈이 들지 않아요. 어릴 때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려면 학원비에 과외비에 돈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스스로 하는 공부에는 돈이 들지 않아요. 혼자 책 한 권 외우는 데 얼마나 돈이 들겠습니까.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영어 암송 학습법, 비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방법입니다.

둘째, 취업이나 이직을 할 때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직업 유동성이 커질 겁니다. 그런 시대에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직무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영어와 업무 간에 연관성이 없더라도, 독학으로 갈고닦은 영어 실력은 취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고용주 입장에서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성실함인데요. 국내에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고 하면, 그 자체로 내적인 동기부여가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증명이 됩니다.

셋째, 평생 가는 취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를 즐기는 것입니다. 여행을 다니고 영화를 보고 외국인 친구를 만나고.... 영어 공부는 인생의 다채로움과 맞물려 더 큰 즐거움을 낳습니다. 영어 공부만큼 취미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도 없어요.

《7번 읽기 공부법》이라는 책의 첫 대목에 다음의 글이 나옵니다.

당신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현재의 자신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해서가 아닐까? 다시 말해 당신 안에는 이미 향상심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향상심만큼은 결코 배워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따라서 향상심을 지녔다면 어떤 축복받은 재능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셈이다.

- 《7번 읽기 공부법》(야마구치 마유 지음, 류두진 옮김, 위즈덤하우스)

작가의 말대로 향상심은 절대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100세 인생, 오래도록 공부가 즐거운 인생을 응원합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위즈덤하우스, 2017)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