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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4일 10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5일 14시 12분 KST

버려지는 노력은 없다

yuelan via Getty Images

통역사 출신 PD라고 해봤자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영어를 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가끔 선배들이 놀려요.

"영어 공부 한 거 후회하지 않냐?"

전 후회하지 않아요. 인생에서 버려지는 노력은 없거든요.

미국 시트콤을 보며 놀다가 문득 한국판 청춘 시트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예능국 PD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입사 후 〈남자 셋 여자 셋〉에 지원했다가 조연출 배정에서 탈락했어요. 당시 저는 서른 살 늦깎이 신입사원이었는데, 담당 연출인 선배랑 나이가 동갑이었거든요. 조직으로서는 껄끄러운 인사죠. 결국 저는 시트콤은 못 하고, 연예 정보나 가요 프로그램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쇼 프로그램 연출의 대가이신 신종인 부장님이 저를 찾으셨어요.

"너, 동시통역대학원 나왔다 그랬지? 저거 통역 좀 해봐라."

TV에서는 1998년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이 방송되고 있었어요. 그즈음에는 국내 채널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생중계하는 곳이 없어서 부장님은 AFKN으로 보고 계셨지요. 그러다가 답답하니까 인간 통역기를 동원하신 거예요. 예능 조연출은 시키면 뭐든 합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나오잖아요. 인체 실험 대상 조연출. 저는 TV 옆에 뻘쭘하게 서서 동시통역을 했어요. 놓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워낙 영화를 좋아해서 제목이나 사람 이름을 알아듣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잘하네? 넌 통역사를 하지 MBC에는 뭐하러 들어왔냐?"

그래서 말씀드렸죠.

"지금은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파파라치를 뛰고 있지만, 언젠가는 〈프렌즈〉 같은 청춘 시트콤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프렌즈〉는 미국 NBC에서 방송하는 인기 드라마예요.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시즌 10까지 이어졌죠.

다음 해에 부장님이 예능국장으로 승진하셨어요. 어느 날 저를 국장실로 부르셨습니다.

"청춘 시트콤을 새로 시작하는데, 거기 가서 조연출 할래?"

저는 그때 처음으로 시트콤을 맡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논스톱〉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로맨틱 코미디 전문 연출가라는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요.

고바야시 다다아키의 다음 문장이 제 생각을 대변해주는 듯해요.

매일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훗날 영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있지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다. (중략) 영어 공부를 그만두면 영어를 쓰는 일에 종사하게 될 가능성은 제로다. 훈련을 그만두면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 《지속하는 힘》(고바야시 다다아키 지음, 정은지 옮김, 아날로그글담)

스티브 잡스가 그랬죠. 인생에서 '점과 점은 이어진다'고. 인생에서 버려지는 노력은 없습니다. 그걸 믿으면 힘이 생깁니다. 힘들어도 지속하는 힘 말이에요.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위즈덤하우스, 2017)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