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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22일 13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21일 14시 12분 KST

신혼여행 비행기를 놓치다

별의 별 생각들이 초광속으로 흘러갔다. 처음엔 돈이 아까웠다. 전체 여행 예산부터 시작해서 가져온 현금까지 머리 속으로 다시 계산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은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수.없.다. 답도 안 바뀌는 계산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담부턴 속상함이 밀려왔다. 처음엔 찰랑찰랑. 갈수록 출렁출렁. 믿을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이토록 틀어져버리다니. 마치 다른 삶 하나를 준비하는 것처럼 모든 책과 인터넷을 그토록 뒤지며 준비했는데, 이제 겨우 도착했는데, 기껏 버스 하나 잘못 탔다고 이렇게까지 취약하게 무너져버리다니. 그리고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을 생각해냈다.

제목 그대로다. 비행기를 놓쳤다. 그것도 신혼여행에서. 우리 둘의 첫 여행에서, 비행기를 놓쳤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맥주, 펍, 기네스' 이 세 단어만으로 우리를 단숨에 유혹했다. 직항은 없었다. 러시아를 거쳐 런던에 도착한 다음, 하루 밤 자고 아일랜드로 건너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무려 6개월 동안 그 계획에 맞춰 모든 걸 준비했다. 결혼식은 생략가능한 모든 것을 생략하면서 대충대충 해치웠지만, 신혼여행만은 정반대였다. 조금의 오류도 없이, 조금의 생략도 없이 꼼꼼히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이 끝났다. 드디어 신혼여행의 시작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악명 높은 러시아항공을 탔다. 그마저도 러시아땅에 언제 발을 찍어보겠냐며 즐겁게 넘겼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밤늦게 런던에 도착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아일랜드로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우리는 일찍 공항으로 출발했다. 타고난 준비쟁이인 나는 한국에서 공항 버스 티켓까지 미리 사서 갔다. 공항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제일 앞에 서 있다가 당당하게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티켓을 내밀었다. 그는 내 티켓을 유심히 보더니 우리를 태워주고, 우리 짐도 실어줬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제 이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수속을 밟고 비행기만 타면 될 일이었다.

나는 마음을 푹 놓았다.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는 표지판만 나오면 이 동네는 뭐가 유명하고, 펑크족들이 유난히 많이 모인다더라, 한때 잘나갔던 동네라더라, 끊임없이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공항 표지판을 봤다. 첨엔 아니겠지, 생각했다. 말 수를 좀 줄였다. 버스는 도시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했다. 공항표지판은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이상해도 많이 이상했다. 런던에는 공항이 총 4개. 우리나라에서 런던으로 날아가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히드로 공항을 제외하고도 3개가 더 있었다. 그리고 아일랜드로 가기 위한 비행기가 출발하는 곳은 Luton공항이었다. 그런데 내 눈 앞에 보이는 공항 표지판에는 Stansted 공항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버스 기사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이거 Luton 공항 가는 버스 맞죠?"

"아뇨. Stansted공항으로 가는 버스예요. Luton공항 가는 버스는 하얀색 큰 버스예요."

"뭐라고요? 아까 아저씨가 제 티켓 확인했잖아요. 한참이나 봤잖아요. 그때 왜 말을 안 했어요?"

아저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도 당황하고 있었다. 우리의 잘못도 있었지만, 표를 꼼꼼히 확인 안 한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몇 시 비행기예요?"

"1시간 반 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예요."

"아, 이 버스는 Stansted공항에 20분 안에 도착해요. 그럼 바로 Luton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세요. 40분만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우리는 비행기 탈 수 있다는 건가요?"

"네"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불안했다. 하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Stansted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버스 회사로 달려가서 Luton공항으로 가는 티켓을 샀다. 두 명의 티켓 가격이 거의 5만원.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시간 안에 가야만 했다. 버스는 바로 출발했지만, 기사 아저씨가 말한 40분이 지나서도 계속해서 알 수 없는 고속도로와 소도시들을 지나고 있었다. 시계만 계속 보며 달달 떨다가, 결국 포기했다. 우리는 비행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4시 15분 공항에 도착했다. 이미 비행기는 15분 전에 출발했다. 저가 항공이라 환불시스템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가는 곳은 동쪽 더블린 공항도 아닌 서쪽의 골웨이 공항. 하루에 비행기가 몇 대 뜨지 않는 소공항. 런던에서 골웨이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 2대뿐이었다. 다음 비행기는 저녁 9시 반이었다. 아니, 아무 것도 없는 공항에서 기다리는 건 둘째 문제였다. 문제는, 평소에는 무척이나 싼 저가항공이지만 직전에 표를 사게 되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밤 9시 반에 출발하는 그 비행기 가격은 무려

76만원.

눈물이 핑돌았다. 우리는 결국 아일랜드를 비싼 돈 주고 갈 운명이었던가. 처음 비행기를 잘못 예약해서 낸 수수료 30만원, 놓친 비행기 값 20만원, 공항을 오가면서 쓴 버스 값 10만원, 그리고 여기서 80만원 정도나 내면서 표를 산다면 런던에서 아일랜드로 가는 90분 편도 비행을 위해 우리는 무려 140만원을 쓰게 되는 셈이었다. 돈 좀 아끼겠다고 한국과 런던 왕복 티켓도 둘이 합쳐서, 텍스까지 합쳐서 140만원에 끊은 우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오늘 밤부터 런던에서 우리가 묵을 곳은 없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골웨이에는 우리가 묵을 곳이 이미 예약되어 있었지만.

"그래, 가자."

"응. 그 방법밖에 없어."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바로 아일랜드에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9시 체크인 시간까지는 못 갈 것 같다고. 11시가 넘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일랜드 주인장은 우리의 사정을 딱해하며 늦어도 괜찮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나니 한 톨의 기운도 남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엉덩이가 아파오는 공항의자에 주저앉았다. 커피 한 잔 살 돈까지 털린 기분이었다. 바로 눈 앞에 펍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곳에 들어가 비싼 맥주를 마실 자격이 없었다. 비행기도 놓친 주제에 맥주는 무슨 맥주. 커피는 무슨 커피. 둘 다 완전 저기압 상태로 돌입했다.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도 덩달아 저기압으로 흘러갔다. 천천히 느릿느릿. 하지만 내 머리 속은 그렇지 않았다.

별의 별 생각들이 초광속으로 흘러갔다. 처음엔 돈이 아까웠다. 전체 여행 예산부터 시작해서 가져온 현금까지 머리 속으로 다시 계산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은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수.없.다. 돈은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답도 안 바뀌는 계산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담부턴 속상함이 밀려왔다. 처음엔 찰랑찰랑. 갈수록 출렁출렁. 믿을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이토록 틀어져버리다니.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우리 둘이 떠난 첫 여행인데. 어떻게 준비한 여행인데. 마치 다른 삶 하나를 준비하는 것처럼 모든 책과 인터넷을 그토록 뒤지며 준비했는데, 이제 겨우 도착했는데, 기껏 버스 하나 잘못 탔다고 이렇게까지 취약하게 무너져버리다니. 고작 이 정도였나. 모든 자책과 모든 원망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나는 차츰 이성의 끈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을 생각해냈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관한 편지' 중

그렇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다. 아무리 원망을 하고 있어보았자 바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바꿀 수 있는 건 이 일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나는 내 여행을 지켜야 했다. 모든 불안과 의심과 절망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여행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내 여행을 박살내버리려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순 없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다른 누구의 여행이 아닌 나의 여행이었다. 우리의 여행이었다. 우리가 기운을 차려야했다. 우선 나보다 더 저기압인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밥을 먹었다. 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먹었다. "더럽게 비싸고 더럽게 맛없네. 역시 영국이야." 일부러 더 크게 욕했다. 한국말로 욕해도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 그리고는 신기한 물건 따위는 있을 리 없는 공항 안 매점을 구경했다. 한국에도 파는 껌을 사고, 한국에서는 더 싸게 파는 챕스틱을 샀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 여행을 지키기 위해.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억지로 웃었고, 억지로 기운을 냈다. 보란 듯이. 이만큼 당해줬으니 지금부터의 여행에서는 나한테 이러면 가만히 안 둬, 라고 누군가에게 선전포고 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140만원이나 내고 프로펠러가 달린 총 좌석수가 40개 정도밖에 안되는 아일랜드 비행기에 올랐다. 마치 보약을 사는 심정으로 위스키 한 병을 면세점에서 사들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위스키를 몇 잔이나 들이키고 바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창밖을 내다보고 상기된 얼굴로 크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마침내, 우리가, 아일랜드에,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