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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03일 10시 37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03일 14시 12분 KST

나의 드라마 카메오 출연기

그날 나의 역할은 카메오였다. 처음 부탁받았을 때는 솔직히 가벼운 마음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딱 두 장면이고 손님한테 와인 주문받는 대사 한두 마디쯤은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완전히 빗나갔다.

'미안해. 아무래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네가 출연하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아.'

문자를 받은 시각은 지난 목요일 밤 11시.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일정으로 이미 녹초가 되어 있을 무렵이었다. 그날 나의 역할은 카메오였다. 오랜 절친인 KBS 드라마국 안준용 피디가 준비하는 작품에서 '레스토랑 매니저'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처음 부탁받았을 때는 솔직히 가벼운 마음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딱 두 장면이고 손님한테 와인 주문받는 대사 한두 마디쯤은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완전히 빗나갔다.

우선 의외로 고난이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내 기준에서 봤을 때 그렇지만. 바람둥이 단골손님과 그 단골손님의 촌스러운 부하직원이 같은 여성과 레스토랑을 찾는 바람에 이런저런 상황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 그런 내면 연기 말이다! 덕분에 나는 말로만 듣던 대본리딩 이라는 것을 배우들과 하기도 했다.

또 한가지 나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촬영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밤 10시로 예정되었던 촬영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스탠바이 상태가 되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피곤함을 싹 잊을 정도로 폭풍 같은 당혹감이 밀려왔다. 아주 간단한 촬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림잡아 서른 명을 훨씬 웃도는 스태프들과 여러 대의 카메라, 이름도 알 수 없는 별의별 장비 등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하는 풍경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실제로 영화에서 사용하는 장비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드라마 촬영에서도 알렉사 카메라 또는 레드 에픽 드래곤 같은 카메라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두 카메라는 전문 촬영장비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데 가격도 대당 1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장비이고 특별히 숙련된 감독님들만이 카메라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다시 한번 대본을 함께 보고, 의상, 헤어, 메이크업을 점검하고 나니 배우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부분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때때로 내게 다가와 자기 대사를 읊는데 드마라 속 인물에 완전히 몰입된 그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참으로 쑥스럽고 난감하기도 했다.

그 사이 메인 감독인 안준용 피디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카메라 상태와 조명, 오디오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실수없이 확인해나가는 작업에 온 힘을 쏟았다. 테이블 위치는 어디가 좋을지, 물컵은 어떤 모양이 가장 적당한지, 웨이터가 와인잔을 내려 놓는 위치는 어디가 가장 적당한지, 걸음은 몇발짝 걸어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새벽 3시가 다 되었지만 촬영장의 열기는 마치 한낮의 사막과도 같았다. 드디어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첫 장면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 때문에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이 고생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에 잔뜩 긴장한 채로 나의 첫 연기에 큐 사인이 들어왔다.

연이 (매니저에게) 시저 샐러드로 하겠습니다.

매니저 와인은 뭘로 드릴까요?

... 늘 먹던 걸로요...

매니저 (다소 냉정하게) 네? 죄송합니다만... 과장님이 어떤 와인을 즐겨드셨죠?

아, 맞다 (웃는다) 저는 안 마셨죠...

매니저 아... (추과장이 약간 안쓰러워 마음을 고쳐 먹은 듯) 그럼 친구 분이 주로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땀흘리며) 네, 그거요.

이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몇 번을 반복해 연기하고 촬영해야 하는지 어쩌면 시청자들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적으로 드라이 리허설 - 카메라 없이 진행되는 리허설 -을 적어도 두 번 정도 하고 본촬영이라는 것이 진행되는데 이 본촬영은 몇 번이나 반복될지 해봐야 아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NG는 수없이 날 수도 있는데 NG의 원인은 다양하다.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리는 경우, 갑자기 웃음보가 터지는 경우, 소품이 망가지는 경우, 카메라 워킹의 오류, 조명이나 음향 등의 문제, 혹은 감독이 의도했던 느낌이 살지 않았던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꼭 NG가 나지 않더라도 여러 명이 동시에 연기와 대사를 하는 경우 서로 조화를 맞춰야하기 때문에 최적의 장면을 찾기 위해 여러 번 촬영을 시도하게 된다. 게다가 촬영장의 느낌과 편집실에서의 느낌은 또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분위기로 변화를 주어 촬영을 해두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 안 감독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주 간단한 카메오 역할이었지만 카메라 위치를 바꾸어가며 촬영을 다시 할 때마다 같은 연기를 반복해야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이었던 것 같다.

보통 드라마의 제작과정은 기타 TV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일반적으로는 기획, 준비, 리허설, 녹화, 편집의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드라마마다 과정이 다 다르지만 단막극의 경우 두세 달의 준비과정을 거친다. 막상 촬영 작업에 착수하면 2-3주 정도의 촬영기간을 갖고 그 가운데에서 실제로 6-8일 정도 촬영이 진행된다. 녹화가 끝나면 스튜디오에서 후반작업을 하게 되는데, 편집과 오디오 작업, 음악 삽입, 최종 믹싱 등을 의미하는 이 후반 작업은 보름에서 한 달까지 소요된다. 내가 참여한 것은 그 많은 작업 중 딱 하루 아니 그중에서도 단 두 장면의 쵤영에 불과했는데 저녁 10시부터 대기상태에 있던 내가 촬영장을 떠난 것은 새벽 5시 50분이었다. 나 역시 방송국에서 일했던 세월이 십년을 넘으니 카메라 앞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한편의 단막극 촬영이 이토록 고되고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새삼, 이 일을 늘 하고 있는 친구가 대견했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게 해주는 배우와 많은 스태프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카메오는 단순히 극의 재미를 위한 것이지만 짧아도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효과도 노리는 것인데 내가 과연 잘 해냈는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촬영장에 있는 시간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 장면에만도 이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데 드라마 한편을 제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 작품이 끝나면 배우와 감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재충전을 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는 드라마를 볼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봐야겠구나... 이런 생각들 말이다.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가장 힘든 부분이라면 역시 제한된 제작 환경 내에서 촬영을 해야 한다는 점 아닐까. 한정된 제작비와 제작시간 말이지. 그 외에 또 힘든 부분이라면 역시 의사소통일 듯해. 족히 50여명은 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을 하는 상황에서 연출가로서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사람이 많다보니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고려해야 하는 바가 정말 많거든. 생각해볼수록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인 것 같다."

바쁜 와중에도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질문 공세를 해대는 내게 친구인 안준용 피디는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었다. 어설픈 내 연기를 칭찬해가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신 조달환, 구재이, 김영훈 배우도 정말 고마웠다. 특히 조달환씨의 명품 연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밤을 완전히 지새우는 바람에 다음 날 하루 종일 좀비 같은 얼굴로 일정을 소화해야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경험이었다. 재미나고 신기한 카메오 촬영의 추억을 선사해준 KBS 드라마 스페셜 <추한 사랑>은 오는 10월 26일 일요일밤 11 시55분에 방영된다. 아직도 한 달 가까이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비지땀을 흘릴 모든 스태프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