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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23일 12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6월 27일 13시 58분 KST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성공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13가지 방법

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유머라고 믿는다. 나는 왜 더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유머를 활용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난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영화의 작품성과 흥미보다 정치 이념이나 메시지가 영화 제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잘 이해 못한다. 적어도 나에겐 영화의 예술적인 면모가 정치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여러분이 잘못들은 것이 아니다. 정치성은 나에겐 이차적이다. 예술성이 먼저다. 왜냐고? 만약에 영화가 개떡 같다면 아무도 그 정치성에 대해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으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9월4일 개막한 제39회 토론토 국제 영화 페스티벌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1. '파이트 클럽(같은 이름의 영화를 참고한 말)' 규칙을 지켜라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규칙이 뭔가? "절대 파이트 클럽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다. 즉 다큐멘터리를 기획하여 만들 생각 말고 영화를 만들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는 그만 만들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라. 이야기 전달의 방법으로 영화라는 멋진 예술 매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만일 정치 운동이 목표라면 입당을 하고 시위에 참가할 수 있다. 또 설교를 하고 싶다면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면 된다. 강의를 하고자 하면 선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선택한 직업은 영화인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 그런 차원에서 난 오늘 '다큐멘터리인'이라는 단어는 죽었다고 여러분에게 선포하고자 한다. 다시는 이 단어가 이용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다. 마틴 스콜세지도 '픽션인' 같은 단어로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큐멘터리인'이라는 없는 말을 제조해 우리 자신을 묘사하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협곡에 몰아넣을 필요는 없다. 이미 격리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더 큰 궁지에 빠트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전통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인'이라는 명칭이 자신에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일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알리고자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1812년 전쟁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칼보다는 포크를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리고자 한다. 이런 이유로 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그래? 정말?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뭔가 못마땅한 사람이나, 매우 엄격한 훈장같이 들리지 않나? "나는 전지전능하므로 내 지혜를 모두에게 나누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PBS(다큐멘터리를 많이 방영하는 미국 공영방송)를 보는 이들에게 말이다!"

진심이라고? 아하. 그래서 수백 수천만명이 매주 다큐멘터리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이군. 여러분들의 지시에 따르고자 말이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만약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다큐멘터리인'이 아니라 침례교회 목사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거다.

일주일 내내 열심히 수고한 사람들은 드디어 주말이 되면 영화를 보러 갈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극장의 불이 꺼지는 동시에 자신이 어딘가 다른 세계로 빠져버리기를 원한다. 울게 하든, 웃게 하든, 사고를 하게 하든, 관객은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훈계 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화면을 통해 보이는 윤리도덕적 손가락질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다. 다큐멘터리 영화인으로서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을 하니까 끔찍하게 들리는가? 뭐라고, 오락물? "어쩌나?! 실수로 재밌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네! 엔터테인먼트 교리에 기준하는 내용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재밌으나 저급화하였으니 큰일 났네! 아, 엔터테인먼트가 문제야!" 이런 걱정을 미리하고 있나?

케빈 레퍼티 형제가 1982년에 만든 '어타믹 카페(핵 카페)'를 보는 순간 난 느꼈다. 냉전 시대에 제작된 소위 말하는 '고개 숙여!'식의 공포 조작 영화물에서 여러 장면을 편집한 작품이었는데 지구의 멸망과 파멸에 대한 진지한 주제를 다룬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상영 내내 폭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그 웃음은 그 어떤 진지한 교훈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우선 웃음은 현실에서 받는 고통을 치료하는 약이다. 그러니 진실을 추구하는 영화 내용을 쉽게 소화되게 하기 위해 꿀을 좀 섞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회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만 해도 사람들에겐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웃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전혀 흠이 아니다. 더군다나 웃음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나.

내가 주의하는 또 한 가지는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축 처져서 극장을 나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격분이다. 우울한 것은 수동적인 감정이다. 반대로 분노는 능동적이다. 분노를 느낀다면 5~10%의 관객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뭔가 해야 돼.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해. 인터넷에서 이 이슈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어. 이런 운동에 참여하여 투쟁할 거야!"

쿠엔틴 타란티노가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때 일이다. 그때 내 영화 '화씨 9/11'이 금상을 수상했는데 시상식 후 식사시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이번 영화가 나를 어떻게 바꿨는지 이야기해드리고 싶어요. 사실 난 평생 투표를 한 적이 없어요. 등록도 안 한 상태이지요. 하지만 L.A에 돌아가자마자 등록을 할 거예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상을 탄 것보다 지금 한 말이 나에게는 훨씬 더 소중합니다. 왜냐면 당신이 느낀 것처럼 다른 수백, 수천만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이런 영화로 방금 말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적일 테니까요."

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유머라고 믿는다. 예전에는 정치적 풍자가 효과적으로 잘 이용되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진보는 유머감각을 잃었다. 웃기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 TV 쇼를 맡았을 때 작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웃기면 안 되는 주제를 다 적어봅시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유머로 전달합시다."

그래서 목록을 만들었다. 대참사, 에이즈, 아동학대... "아동학대에 대한 웃긴 영화라고?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동학대에 대한 희극 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머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유머야말로 정말 충격적일 수 있다. 유머와 비난은 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이를 압박하는 사람들을 적대할 수 있는 매우 날카로운 칼과도 같다.

나는 왜 더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유머를 활용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난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영화의 작품성과 흥미보다 정치 이념이나 메시지가 영화 제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영화의 예술적인 면모가 정치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여러분이 잘못들은 것이 아니다. 정치성은 나에겐 이차적이다. 예술성이 먼저다. 왜냐고? 만약에 영화가 개떡 같다면 아무도 그 정치성에 대해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영화를 보는지 모르고, 또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 못한다면, 즉 영화의 예술성을 배제해버리면 내가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교훈에 귀담아 줄 사람이 없어진다. 그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예술성이 먼저다. 우선 영화여야 한다. 그 다음에 다큐멘터리여야 한다.

2. 관객이 이미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은 금물이다.

난 그런 유의 다큐멘터리는 보러 가지 않는다. 즉, 나를 바보 취급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이 나쁘다는 식상한 교훈은 필요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단지 뭐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러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싫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교훈은 듣고 싶지 않다. 또 한 가지 예로 유전자 조작 식품이 해롭다는 사실을 자기가 처음 발견한 것처럼 떠드는 영화제작자의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 혼자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똑똑한 인간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 아는 이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식품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 각자에게 매우 귀중한 주말 시간을 할애해서 그런 영화를 볼 것 같은가?

나도 인정한다. 미국의 3억1000만명 인구 중에 정말로 무식한 인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마 1억명 정도는 그런 바보 측에 속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거다. 따라서 정말로 엄청난 인구가 완전 무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남은 2억1000만명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뇌의 반 정도는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멍청한 부류에 대한 걱정은 잊어버리고 나머지 3분의 2에 집중하자. 그들이 이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주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이미 뻔한 이야기는 금물이다. 생소한 것을 소개하라. 관객이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구경을 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다.

'로저와 나'를 만들 때의 일이다. 플린트 시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는 한 가족이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찰관에 의해 퇴거당했다. 나는 그 경찰관을 촬영했다. 집 안에 있던 트리와 아이들 선물까지 길가에 내다놓는 그에게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누구를 이렇게 퇴거시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요. 누구가 아니라 한 4,5 가족을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쫓아내지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왜 난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못 봤지요"하고 물었더니(무어의 고향이 플린트이다) "글쎄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대낮에 쫓아내는데요."하는 것이었다. 플린트에는 보도국이 있는 4개의 지역 방송이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런 뉴스를 크리스마스이브나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내보낸 적이 없는 것일까?

내 기억으로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거의 똑같은 3가지 보도를 들어야 했다. 전날 밤에 교황이 자정 미사를 집전했다. 밤 11시 뉴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캐나다에서 넘어 오고 있다고 한다. 왜 꼭 캐나다를 지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정치 뉴스도 한 건 정도 꼭 끼어있다. 예를 들어 미국 자유인권협회가 시청 앞의 그리스도 성탄화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는 유의 뉴스. 이런 뉴스를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접하지 않나? 하지만 부모가 임대료 150달러를 한 달 못 냈다고 경찰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식들 보는 앞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와 선물을 길에 내팽개치는 장면은 뉴스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진짜 범행이 아니면 뭔지 난 모르겠다. 즉 은폐된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로저와 나'는 미국의 실업수당에 대한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실업수당을 받으러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찍지 않으려고 했다. TV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그런 식상한 이미지는 안 쓰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영상에 이미 면역이 돼 있다. 맨날 화면에 나타나니까 말이다. 우리가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는 이런 미국에 살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게 만드는 영화다.

3. 대학교 강의 같은 스토리텔링은 하지 말아라

이런 현상은 빨리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방법, 새로운 스토리텔링 모델을 고안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더 잘 설명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내가 대학을 3학기밖에 안 다녔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내가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번도 논문 쓰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학교가 정말로 싫었다.

늘 그랬다.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서 글로 또는 말로 반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학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누가 그 해답을 풀어 교과서에 수록했으니까. 화학실험도 실험이 아니었다. 이미 다른 이가 입증을 한 실험을 나에게 다시 하게 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난 학교를 너무 싫어했고 수녀 선생님들은 나의 그런 태도를 너무 잘 알았다. 난 늘 지루한 나날을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보냈다. 학교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4. 난 피마자유(약 100년 전 만병통치약으로 미국에서 인기 높던 기름 제품)를 싫어한다. 그런데 요즘 다큐멘터리는 이런 역겨운 약 같은 맛이 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약이 아니다. 약이 필요하면 알아서 의사를 찾는다. 극장에 약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없다. 초콜릿과 팝콘을 먹으면서 재밌는 영화를 보고자 한다. 극장에 가기 위해서 비싼 베이비시터를 구해야 했고, 비싼 영화 표를 샀으며 9달러짜리 팝콘을 샀다. 많은 돈을 쓴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집에 간다. 그게 그들의 '금요일 밤'이다. 내 편집실 게시판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하나는 "확실하지 않을 때는 나(무어)를 편집(삭제)해 버려라"다. 두 번째는 "기억하자. 우리의 관객은 이 영화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섹스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이다.

즉 그들의 저녁시간을 잡칠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주일 내내 섹스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 데, 금요일 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의 기분이 "아. 정말로 너무 끔찍했어. 기분이 너무 칙칙하네" 이런 상태가 된다면 불꽃놀이는 강 건너 간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옳지 않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의 에너지와 열정은 흥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흥분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5. 진보는 진부하다.

사람들은 좌파를 진부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많은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 것이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유머 감각을 잃은 지 오래됐다. 어떻게든 덜 지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60년대에는 좌파(진보)가 매우 웃겼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좌파는 너무 심각해졌다. 그런 태도에서 얻은 이득은 별로 없다.

6. 왜 여러분의 영화는 정말 나쁜 인간들을 지적하지 않는가? 진짜 악당들 말이다.

왜 나쁜 놈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인가? 왜 특정 기업을 추궁하지 않나? 왜 코크 형제(미국의 대표 보수 기업인 ­ 정치 세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인식된)의 이름을 대 놓고 비난하지 않는 건가? 지난 몇 년간의 베스트 다큐멘터리 후보명단을 보면 잘해 봤자 2,3개... 어떤 때는 4개 정도 빼고는 미국에 관한(미국인으로서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 정치적인 면을 지닌, 그것도 아주 날카롭고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가 드물다.

지난 몇 년간의 명단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역사에 관한 굉장한 다큐멘터리들이 있다. 인도네시아나 팔레스타인에서 발생되고 있는, 예를 들어 '고장 난 5개의 카메라' 같은 작품이 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지 않다. 적어도 수상 후보나 관객이 많이 동원되는 그런 것은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좋은 작품들도 많지만, 대부분 제작사나 나중에 TV 방송 때 혹시 법적 '문제'가 야기될까 봐 그 이슈를 너무 조심스럽게 다룬다.

어제 누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런 말을 물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요? 소송 당할 위험은 없을까요?" 당연히 소송당한다! '로저와 나' 때문에 난 20번 이상 소송을 당했다. 여러분들도 소송 당할 것이다. 증오도 감수해야 한다. 여러분이 폭스뉴스(미국의 대표 보수 언론)의 새로운 진보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망각한 것인가? 이 일에 안주란 없다. 한 시민으로서 영화인의 역할을 받아들였다면 그런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 위험 정도는 당연한 것이다. 난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번 일이 우리의 마지막 작업이 된다고 해도 우리는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권력을 지배하는 모든 이가 우리를 기피하게 할 정도의 내용이어야 한다!" 이렇게 '죽을 각오'를 해야만 여러분이 바라는 진실된 성공을 맛볼 수 있다.

7. 영화는 개인적인 면을 잘 살려야 한다.

꼭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일부 사람에게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카메라 앞에 서지 말자. 사실 나도 그런 유의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로저와 나'에 출연하게 된 것은 사실 예상치 않았던 일이다. 그 이야기로 여러분을 지루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관객은 실제 인물에 하는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대부분은 인간의 목소리를 잘 증폭시킨다. 모건 스펄록, 앨 고어, 빌 마, 가스랜드, 쇼아, 등이 좋은 예다.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가는 개인적인 관점 또 내레이션 삽입을 싫어한다. 고작 해봤자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 정도다. 하지만 관객은 누가 또 누구 입장에서 자기들에게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한다.

예를 들어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에서는 우리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늘 명확하다. 영화 '그래비티'를 볼 때도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왜냐면 그 영화는 할리우드의 워너브러더스가 배급했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 영화가 아니었다. 멕시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는 멕시코 감독인데 '해리포터' 시리즈도 연출한 적이 있다. '해리포터'를 보았던 나는 '그래비티'를 보러 가면서 그 내용이 매우 암흑하고 예측불허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여러분도 뭘 기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래비티'를 보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먼저 내용을 안 들었다면 쿠아론이 주연 산드라 불럭과 조지 클루니를 다 죽게 할 수 있다고 상상했을지 모른다. 바로 그런 점이, 다음 10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이 안되는 그런 구성이 할리우드 영화와 달랐기 때문에 매우 흥미진진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관객도 영화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으면 안 된다. 영화 '가스랜드'에서 나오는 것처럼 물이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기가 막히는 구성이 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야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동료에게 "그 영화 꼭 봐야 해"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해야 한다.

8. 카메라로 언론을 조명하라.

기존 언론이 어떤 주제를 왜 안 다루고 있는지를 알리도록 하라. 내 영화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인데, 난 촬영 중에 갑자기 하던 것을 멈추고 카메라를 오히려 다른 카메라(즉 언론)에 돌린다. 그러면 정말 꼴사나운 상황을 볼 수 있다. '볼링 포 콜럼바인(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6살짜리 어린이의 장례식 장면이 있다. 수많은 언론인이 줄을 서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다. 갑자기 우리 카메라를 돌리자 어느 기자가 이 슬픈 행사에 와서는 방송 준비한답시고 머리 손질하느라 귀에 이어폰 꽂느라, 정신없다가 갑자기 '쇼 시작'에 맞추어 입을 벌리는 것이다. 언론이 얼마나 우리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과 따라서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진실이 얼마나 제한적인 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9. 출판, TV 산업은 논픽션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논픽션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물론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고서는 그런 추측이 어려울 거다. 하지만 '뉴욕타임스'의 '서평'란을 열어보시라. 픽션보다 논픽션에 대한 비평이 세배는 더 많다. 논픽션 책은 엄청나게 팔린다. 논픽션 TV는 또 어떻고? 시청 순위를 보면 안다. 톱 25개의 쇼 중에는 진취적인 '60분'이 있는가 하면 '댄싱 위드 더 스타'도 있다. 그리고 스티븐 콜베어, 존 스튜어트, 빌 마, 또 존 올리버가 진행하는 토크쇼도 있다. 다 논픽션 쇼이며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그리고 이 네 개의 토크쇼는 유머를 이용하여 진실을 널리 선포하고 있다. 그것도 매일 밤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쇼는 논픽션이면서 다큐멘터리와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콜베어와 스튜어트의 인기는 대단하다. 이들이 쇼를 운영하는 철학과 같은 맥락에서 여러분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동원하는 엄청난 관객을 왜 지향하지 않는가 말이다. 논픽션 책과 논픽션 TV를 너무 사랑하는 미국인들이 논픽션 영화는 절대 보러 가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진실에 부합하는 엔터테인먼트를 원한다. 내 말을 따라 해 보자. 미국 관객은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자 한다! 자기가 진실을 추구하는 엔터네이너라는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다면 이 분야를 떠나야 한다. 교육자가 늘 모자라니 가서 선생이 되라. 아니면 목사도 좋고, 그것도 아니면 환경친화적인 매장의 운영자가 되어도 좋다.

10. 가능한 한 여러분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만 카메라에 담자.

그런 사람들이 더 흥미롭다. 엑손이나 GM 종사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녹화해 보라. 또 반대 의견을 가진 이와 대화를 해보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관리자와 만나도록 하자. 물론 내 얼굴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일반 방송사에서는 '권장'하지 않는 방법을 난 이제 강구해야 한다. 그들이 권장하던 안 하던,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일반 국민들을 위한 것이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몇 명의 거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부자들의 핑계를 까발리는 것이 내 임무다.

11. 여러분도 관객이다.

촬영을 하면서 분노하고 있나? 아니면, 울고 있는가? 마이크에 들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너무 우스워 옆구리를 잡고 웃고 있나? 만약에 그런 현상이 촬영 시에 나타난다면 관객도 같은 반응으로 여러분의 영화를 반길 확률이 높다. 그 느낌을 신뢰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한명의 관객이기 때문이다. 난 직원들에게 "관객이 지금 제작진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관객이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난 영화를 찍는 순간 이미 관객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난 바로 그런 관객을 대신한 촬영장의 인격체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12. 짧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편집은 짧게 하라. 비슷한 내용이라면 단어 수도 줄이자. 장면 수도 줄이자. 누구의 똥 냄새도 장미향이 될 수 없고, 바퀴를 발명했을 정도로 대단한 인간도 거의 없다. 사람들은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인지한다. 그들은 관객에게 두뇌가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영화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사실 세상 물정에 대해 약간 어리숙한 사람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자기 잘난 척을 하는지, 아니면 관객을 바보 취급하는 지 다 알아차린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2억천만 명은 바보가 아니다. 일정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약간 모자랄 뿐이다. 이걸 생각해보라. 미국 시민 중에 80%는 여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세상을 보러 집을 떠나는 것을 상상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잘 알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도 함께 구경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쫓아올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존중받는다고 느끼면 말이다.

13. 마지막으로... 음향이 이미지보다 더 중요하다.

특히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 사항인데 음향기사에게 영상기사만큼의 급여를 지불하라. 음향이야말로 영화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주 요소이다. 픽션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장에 가서 초점이 잠깐 안 맞는 화면이나 옆으로 조금 넘어가는 화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누가 일어서거나 큰 목소리로 불평을 한다거나 영상기사를 찾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향이 중단되는 순간 극장 안은 혼돈의 도가니로 바뀐다. 안 그런가? 화질이 조금 안 좋다고, 또는 촬영 중에 경찰이 쫓아오는 바람에 화면이 심하게 흔들린다고 관객이 "도대체 왜 카메라가 저렇게 흔들리는 거야? 그만 흔들리게 해!"하며 고함을 지르는 일은 드물다. 또 어떤 장면을 급하게 찍다가 초점이 안 맞았다고 하자. 스토리 구성만 제대로 되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귀로 들을 수 있으면 관객은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즉 청각적으로 안테나가 곤두서 있다. 그러니 음향업무를 싸게 때우려고 하지 말자. 다큐멘터리에는 특히 음향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때, 중요하게 여기는 13가지 사항을 이야기했다. 너무 오래 이야기 한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지만 그만큼 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수백 수천만 명이 다큐멘터리를 즐기기를 바란다고 해두자. 나도 사실 배급사와 영화사 또 투자사들을 탓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인인 자신의 문제를 인정할 때다.

우리가 만드는 영화가 극장에서 보일 만한 작품인가? 적어도 나는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싶다! 아이폰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절대 반대다. 물론 내가 늙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도 본다고 하지만 여기 있는 여러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아이폰으로 보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확실하게 아니다.

몇 년 전, 미국 우체국은 모나리자 우표를 발행했다. 그렇다고 진짜 모나리자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것과 똑같을까? 아니다. 다만 모나리자의 모습을 본뜬 작은 우표일 뿐이다. 그러니 우표 이미지를 본 걸 모나리자라는 걸작을 본 걸로 착각하면 안 된다. 꼭 모나리자를 보고 싶다면 그놈의 여권을 받아 파리에 직접 가도록 하라. 거기 사는 사람 중에도 영화 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