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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6일 07시 09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6일 07시 10분 KST

놀이터는 확실히 사랑과 관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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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는 길과 길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숨은 듯 위치한 작은 놀이터의 정자에는 저녁마다 어른이 많다. 대부분은 연인들이다. 오늘은 어떤 남성이 여성의 품에 안겨 운다. 눅눅한 관계를 못 본 척 귀로 힐끔거리며 지나쳐왔다. 다시 만나자는 애원. 상대의 상실에 자신이 다치는 게 드러나는 사람. 나는 저런 식의 사랑 방식이 지긋지긋하고, 꼴도 보기 싫고, 벗어날 수 없이 좋다. 갈고 닦은 관계에 날이 설수록 도려낸 단면이 깨끗해져 간다. 매끄러운 최근의 기억을 손으로 쓸어보면 발 걸릴 기억 하나 없이 참 깔끔하다. 지저분한 마무리가 언제였더라.

seesaw

낮 무렵 어린이들의 공간은 해가 지면 어른이들의 공간이 된다. 놀이터에는 자주 정자가 있다. 어린 시절은 누가 누가 먼저 놀이기구를 차지하나 곤두서있었는데, 커서는 놀이기구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정자에만 앉아있었다. 쪼꼬미 때 첫사랑이 싹튼 곳도 놀이터였다. 좋아하는 남자애와 서로 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엄청 뛰어다녔지. 별명이 조폭 마누라였던걸 보면 거참 터치를 갈망하는 꼬맹이였구나 싶다. 조숙했던 나는 사춘기를 지나오며 더는 때리지 않아도 터치 할 수 있음을 일찌감치 알았다. 그때부터 정자에 앉았다.

놀이터는 확실히 사랑과 관련 있다고 주장해왔다. 산책 중 하염없이 걷다가 놀이터가 보일 때 즈음이면 멈춘다. 관성을 확인해보겠다며 그네 위에 앉아 꼼짝 않고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 바람의 폭을 확인한다. 방해될까 숨도 조용히 쉬어가며, 연구실도 아닌 놀이터에서 온몸으로 이론을 확인하고자 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겠지. 머리의 얕은 이론상으로 멈춰선 안 되는 그네의 폭이 그래 봐야 차츰 좁아진다. 당연히 언젠가는 멈추리라 알고 있는, 너무 똑똑하거나 얕은 신뢰를 가진 바보의 실험. 그러나 멈추는 건 끝내 확인하지 못한다. 그때까지 버티기엔 짧은 인내와 체력으로 결국 두 다리를 접는다. 탁, 땅을 딛자 빈 그네가 몸을 부르르 떤다. 나로 인한 파동도 나를 잊고 멈추겠지.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랑은 언젠가 멈추지. 안 멈추리라 믿거나 혹은 완전히 멈춰버릴 순간을 기다리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

seesaw love

그네의 역설은 우린 실은 떠 있는 게 아닌 매달려있다는 점이다. 그네의 모순은 완전히 더 올라가고자 최대치로 발을 구르면 빙그르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관성을 꿈꾼 관계가 흔들리고, 바람을 맞고, 서로에게 허락된 폭이 줄어 들어갈 때, 나이 먹은 나는 다시 발을 구르기보다는 들고 있던 다리를 내린다. 목적 없는 산책을 재개한다.

이전에 시소의 이야기를 했나 그랬지. 무거운 사람은 늘 아래로 간다고, 순도 높은 마음도 언제나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그건 괴로워 가벼워지고자 수분을 짜내게 된다고. 스웨터 하나를 사면서도 울 함량 따지지 않니, 라며 순도를 찬양했지만, 뭐랄까. 너 다시 무거울 자신이 있니. 놀이터는 오르내리는 곳이지 않니. 내려가려고 올라가고 올라가려고 내려가는 곳 아니니. 넌 올라가고만 싶은 주제에 산책마다 왜 놀이터를 기웃거리니.

상념 하나 없이 하루가 쉬웠다. 나는 이토록 매끄러운데, 누군가의 관계 하나 저문 저녁의 공기는 텁텁한 물기로 놀이터의 모래마냥 거칠고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