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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09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13일 06시 11분 KST

한국의 첫 SF는 왜 쥘 베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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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SF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재일 유학생들에 의해 발행되었던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쥘 베른(Jules Varne)의 『해저2만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 1870)』를 번안한 「해저여행기담」이 실리면서부터였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바다. 때문에 한국의 SF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해야 하지만 단순히 쥘 베른의 작품을 번안했다는 것 외에는 이제까지 별다른 의미부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작품이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서 한국에 소개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SF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발표된 배경과 작품에 대해 다시 한번 들여다보아야 한다.

《태극 학보》는 광무(光武) 10년(1906년) 8월 24일 창간되어 융희(隆熙) 2년(1908년) 12월까지 통권 27호를 간행한 후 폐간되었으며, 「해저여행 기담」은 8호부터 연재되어 세 번의 휴재를 거치고 21호까지 총 11회 동안 연재되었다. (한국학문헌연구소, 『韓國開化期學術誌』, 서울亞細亞文化社, 19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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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여행기담」의 제1회 연재본, 당연하지만 국한문혼용체다

작품을 밝히면서 작가(여기서는 역자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헌을 보면 1회엔 '法國人 슐스펜氏 原著'에 번역자 '朴容喜'라고 되어있다가 6회엔 '自樂堂'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다가 9회엔 다시 '冒險生'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처음 번역자로 소개된 박용희는 문헌상으로는 1913년에 동경제국대학교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일제 강점기에 발간되었던 수많은 간행물에 관여(《共修學報》, 《大韓學會月報》, 《先驅》등 다수의 1900년대 초반 간행 잡지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지금의 중앙고등학교인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했던 인물과 동일인 인걸로 보인다. 당시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인물의 활동은 잡지의 인지도에도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6회부터 굳이 별명을 붙여 다른 이름을 표시한 것은 아마도 번역자가 박용희에서 다른 인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단순히 번역자가 바뀐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제목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는데, 처음 연재를 했을 당시의 제목은 '海低旅行'이었고 '埼譚'은 하단에 작게 표시되어 있다. (위에 첨부한 이미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러다가 3회부터 비로소 제목에 '기담'이 붙어 '해저여행기담'으로 명명되다가 10회(연재 종료 1회전)에 가서 다시 제목에 '기담'이 삭제되고 해저여행으로 바뀐다. 이는 작품의 기획과 번역이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의 지면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짧은 연재 기간 중간에 번역자가 두 번이나 바뀌고 제목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연재의 이유가 쥘 베른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는 연재가 11회를 끝으로 중단되었고, 11회까지 연재된 분량도 『해저2만리』의 극히 일부분을 번안한 것일뿐더러, 이야기 자체가 미완인 상태로 연재가 종료된 것까지 감안하면 제법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더욱이 「해저여행기담」이 단순 번역 작품이 아니라, 원작의 내용을 편집하고 수정한 번안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대입하면 해당 작품이 단순히 쥘 베른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서 연재된 것은 아니었다는 짐작에 좀 더 무게를 실을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유로 1907년부터 1908년 까지 「해저여행기담」이 《태극학보》에 연재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잡지의 성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태극학보》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국가에서 선발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한 인재들이 모여서 만든 '태극학회'의 간행물이다. 이들의 목적은 학술의 보급과 애국 계몽 운동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이 정기간행물을 만들어서 정보를 나누는 이유도 어디까지나 "우리 동포 국민의 지식을 개발하는 데 작은 조력(助力)이 되고자 하는 미성(微誠)"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태극학보》내에 실린 글들은 근본적으로 동포 국민의 지식을 개발하는데 조력하는 정보를 공유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해저여행기담」은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 수용하고 전파된 것이 아니라 1920년대까지 '과학=문명'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었던 한국에서 과학이라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접근방식(백지혜, 「1910년대 이광수 소설에 나타난 '과학'의 의미」, 『한국현대문학연구』 14호, 2005, 144~146쪽 참조.)으로 취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방법론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조선은 "논픽션에 순치될 것을 어려서부터 교육받아 왔고 또 그만큼 그에 익숙한"(조남현, 『小說原論』, 고려원, 1982, 30쪽.)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무리 유학을 와서 신문물을 받아들인 유학생들이라 할지라도 시도하기 힘든 방법이었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자못 과감한 행보와 같이 보이는 이러한 모습들은 당시의 유학생들이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론들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까지 확인하고 나면 과학기술에 대한 계몽을 위한 텍스트가 왜 하필 쥘 베른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남는다. 한국의 초창기 SF는 쥘 베른의 작품에 집중되어 있는데,「해저여행기담」외에도 1908년에 이해조가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Les Cinq Cents Milions de La Begum, 1879)』을 번안한 『철세계』를 발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철세계』에서는 무려 과학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장르를 밝힌 것을 감안하면 기담이라고 규정한 「해저여행기담」보다 이해조의 『철세계』를 본격적인 SF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과학소설이라는 용어가 장르의 특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단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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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의 『철세계』도입부, 상단에 '과학소설'이라고 명명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SF(Science Fcition)라는 용어는 1920년대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이 그가 발행하던 잡지《어메이징 스토리즈(Amazing Stories)》에서 언급한 'Scientifiction'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장르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용어로써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Science-Fiction'이라는 단어 자체는 1851년에 발행된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의 책(William Wilson, A Little Earnest Book Upon A Great Old Subject, Daton and Co., holborn hill (London), 1851, pp.138~139.)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

"Now this applies especailly to Science-Fiction, in which the revealed truths of science may be given, interwoven with a pleasing story which itself be poetical and true."

다만 휴고 건즈백은, SF라는 단어에 일정한 에피고낸이 확립된 장르적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어떠한 소재나 경향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아니라 SF가 하나의 정형화된 장르로서 확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장르의 탄생이 휴고 건스백에 의해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용어 자체는 그 이전시기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SF라는 장르적 특성이 성립되기 이전 시기에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해서 해당 용어가 장르적인 인식을 구분하고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오히려 단순히 1900년대 초반부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쥘 베른이나 월즈 등의 SF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것의 영향을 받아 도식적으로 분류한 것이라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저여행기담」에서 언급한 기담과 『철세계』에서의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의 구분은 담론으로 보았을 때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다시 왜 쥘 베른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면, 쥘 베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장르로서의 SF가 성립되기 이전까지 과학소설의 태동을 이끌었던 (이들의 시기를 고장원은『세계과학소설사』(2008)에서 '선구적 시기'라고 구분하고 있기도 하다) 메리 셸리(Mary Shelley)와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 쥘 베른, H. G. 웰즈(H. G. Wells) 등은 각기 다른 이야기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공통으로 과학기술과 그것의 구현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지만, 그중에서도 쥘 베른은 과학지식에 논리적 추론을 강조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이야기라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예측한 미래들은 과학기술로 인해서 변화하는 긍정적인 모습이었고, 현실 가능성에 대한 타진을 통해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합리적인 상상력을 구현한다는 SF의 고유한 이야기 방식인 '외삽(extrapolation)' 이 그를 통해 시작되었다고도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방식이 한국에 쥘 베른의 작품들이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SF는 서구의 문명이라고 대표되는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였고, 과학기술 자체를 전달하기보다는 과학이라는 생소한 개념의 필요성 대한 일종의 계몽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웰즈의 작품보다 쥘 베른의 작품이 먼저 소개된 것은 과학기술로 인해서 변화하게 될 사회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에 쥘 베른의 작품이 좀 더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웰즈의 작품들이 과학기술의 구현 가능성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했던 반면, 쥘 베른의 작품들은 현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소재들을 등장시키면서 (때문에 쥘 베른의 작품에서는 잠수함이나 비행체 같은 구체적인 탈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부분을 강조한다. 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견지가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레퍼런스와 같은 작용을 하게 되었고, 그 필요성을 인지한 유학생들이 쥘 베른의 작품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국가에 쥘 베른의 작품이 먼저 소개되어 SF에 대한 저변이 형성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들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부분들이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쥘 베른의 작품을 유학생들의 잡지에 실으면서 의도했던 것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제반 학술로서 과학이 좀 더 알려지고, 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부국강병에 이르는 것이었다. 때문에 1907년의 「해저여행기담」은 문학 장르인 SF로서 한국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서구화, 근대화를 완성한 국가에 대한 청사진으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독자가 유학생들이었던 지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이름 등을 바꾸고 설정을 현지화시켜 번안 과정을 거친 것 또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소설 작품이나 단순히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통해서 근대화된 조국의 미래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저여행기담」에서 나타난 SF에 대한 인식은 이후로 한국 SF의 초기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이해조의 『철세계』와 김교제의 『비행선』(1912), 웰즈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1895)을 번역한 김백악의 『80만 년 후의 사회』(1920) , 카렐 차펙(Karel Capek)의 『R.U.R(Rossum's universal robots)』(1921)을 박영희가 번역한 「인조노동자」(1925, 《개벽》 연재)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1920년대엔 단순히 과학기술로 변화될 사회에 대한 대한 프로파간다로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의 확장이 이루어지지만, 기본적으로 과학과 SF를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짧게는 1970년대, 길게 보면 199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진다. 약 100여 년 동안 과학은 외부에서 유입된 일종의 아이템과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지금은 개선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확신하기 어렵다)

「해저여행기담」에서 해수와 전기에 대해, 그리고 공기의 구성성 분등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들은 쥘 베른의 작품에서의 내용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취지와 맞지 않게 종교적인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던 것은 단순히 과학기술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하게 될 조국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제2회에서 역자는 쥘 베른의 원작에는 없는 성경 빌립보서 4장을 인용하면서 "구주는 가장 약한 자에 더욱 동정하신다는 말씀에 의해 장래에 극락의 천당과 최강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 작품이 왜 소개되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太極學報》,9호(光武 十一年 五月 三日), 四十七.; 한국학문헌연구소, 『韓國開化期學術誌』2권, 서울亞細亞文化社, 1978,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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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에서 "가장 약한자를 동정하신다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장래에 극락과 최강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첫 SF로서 쥘 베른이 소개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나 일본의 영향력 등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유학생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들에게 두루 신문물로서의 과학기술을 계몽하기에 적합한 텍스트였기 때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의 계몽은 과학기술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인해서 부강해질 나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를 위해서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쥘 베른의 작품은 국가의 부강을 위한 청사진이었었을 것이다. 서글픈 것은, 이 당시에 과학이라는 언표를 도입하면서 견지했던 과학에 대한 도구적인 개념들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고착화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SF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된 이유고, 이후로 이 공간을 통해서 한국 SF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이야기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