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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2일 06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6월 02일 14시 12분 KST

쿠오바디스, 박근혜

박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걸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엔 '퍼주기'라는 식의 반발도 훨씬 작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진보파가 의제를 빼앗겼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 진보정치세력의 설 자리가 좁아지더라도 남북한 7500만 인민의 삶이 나아지면 그게 좋은 일이니까요.

연합뉴스

지난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한 데 이어 독일의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를 찾은 것입니다. 베를린에선 가욱 독일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를 만나긴 했지만 저에게 들르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지난주에 베를린에 온 여야 국회의원 4명이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제 연구실을 예방한 것과는 사뭇 달라 유감이었습니다.(사진 오른편의 어질러진 책상쪽이 제 자리입니다.) 미안하다는 전화 한 통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야의원들은 KBS 프로그램 <파노라마> 제작과 관련해 독일 여기저기를 9일간 둘러보는 반면, 박대통령은 4일뿐인 빠듯한 일정이었으니, 제가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겠습니다. 하하하.

(맨오른쪽부터 김두관 전지사, 홍일표의원, 우윤근의원, 이언주의원, 신의진의원)

박대통령의 동정은 여기 독일에서는 별로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골든타임 뉴스인 Tagesschau(저녁 8시-8시15분)에서는 박대통령 방독에 관해 단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신문보도 기사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박대통령 방독 바로 이틀 후에 중국의 시진핑도 독일에 왔습니다. 그에 대해선 Tagesschau에서 톱뉴스로 보도하고 신문에선 지면 한 면 이상을 통째로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국력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겠지요.

다만 Der Tagesspiegel이란 신문에서는 박대통령 방독과 관련해 한국특집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의 온라인 판에서도 일부 보도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KBS에 해당하는 ARD는 박대통령과 가벼운 인터뷰를 진행했고, Bild, Die Zeit, Berliner Zeitung의 온라인 판 등에서도 간단한 동정보도가 있었습니다. ARD 인터뷰는 링크를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언론에선 박대통령 동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드레스덴 연설은 공중파 3곳을 비롯해 종편 4곳과 YTN, 뉴스Y 모두가 생중계했다고 하네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렇게 한 적이 있을까요. 국정원과 언론을 꽉 움켜쥔 박대통령의 정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재독 한인들도 환영행사를 개최했습니다. 박대통령에게 박수치는 환영행사야 한국 언론에서 충분히 보도했을 터이니 비판하는 환영(?)행사 장면을 두어 개 소개할까 합니다.

하나는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에서도 보도한 토론회입니다. 독일금속노조(IG-Metall, 아래 사진)에서 장소를 제공해 마련된 행사입니다. 토론회 제목은 "위험에 처한 민주주의? - 한국의 현 정치 상황"이었습니다. 토론 내용은 링크한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십시오.

저도 이 자리에 가보았습니다. 우선 청중이 150명가량으로 적지 않은 숫자였고, 그들의 절반 가까이가 독일인이어서 놀랐습니다(아래 사진). 독일인의 글로벌한 연대의식은 존경할 만합니다. 요즘엔 아시아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원 봉사하는 한국인도 늘어나고는 있습니다만, 지척의 동포도 외면하는 한국인이 아닌가요.

행사장엔 송두율박사 부부도 왔던 모양입니다만,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고초를 치른 분으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사이지요. 동시에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의 유산입니다.

그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해서 북한체제는 그 내재적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을 내재적 논리로 '이해'할 필요는 있겠으나 그게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논리가 되어선 곤란한데, 송박사는 그 부분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와 옹호는 같은 게 아니지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그는 한동안 북한체제 편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직접 만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남북한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고, 과거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남북한의 엄중한 대치현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이브한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한국 귀국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지 말던가, 들어오려면 자신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을 미리 털어놓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리해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지요.

송박사만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진보지식인들도 한국 현실과 상당히 유리되어 있습니다. 지난달 베를린에서 만났던 박노자 교수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공공연하게 coming-out한 용기는 대단하지만, 한국현실에 대한 꼼꼼한 조사 없이 구체적인 기업상황에 대해서까지 발언하는 무책임한 자세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요. 제 책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를 건네기도 했는데, 저하고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통념에서 벗어난 괴짜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라야 창조적 사고나 박대통령이 말만 앞세운 창조경제가 실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송두율박사 같은 분의 부정적 영향은 이제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해졌습니다.

이곳 독일에는 송박사만이 아니라 한때 북한과 가까웠던 전력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분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북한과의 통일을 주창하려면 먼저 이들부터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포용 여부는 통일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금석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선 수구적 보수언론의 공세로 인해 이들에 대한 포용적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박대통령은 그런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처지입니다.

'종북'이라고 공격받는 게 아니라 '통 큰 대통령'으로 박수 받겠지요. 드레스덴 선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갔더라면 아마도 그녀의 진정성도 인정받고 선거 전략에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새누리당에는 선거전략가가 없나요.

아하 그렇군요! 새민련이 기초단체 정당공천 폐기라는 자살골을 고집하는 형편 없는 수준이니 선거전략 따위가 굳이 필요 없군요. 게다가 인혁당 사건이나 정수장학회 문제에서 보여준 박대통령의 속 좁은 심성에서 그런 통 큰 행보를 기대하는 게 애당초 무리이기도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샜습니다만, 박대통령의 베를린 방문엔 또 다른 환영행사도 진행되었습니다.(메일로 전달 받은 환영 사진 몇 장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작년 프랑스 방문 때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시위에 비하면 그리 자극적인 장면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재독 한인들은 제불 한인보다 멋을 잘 모르는 군요. 멋은 역시 프랑스입니다.

박대통령 역시 독일에선 별로 멋이 없었습니다.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발언에선 그저 밋밋했고 '한 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니 독일 이전에 네덜란드에서부터 기대를 접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아베 수상이 자기 딴에는 많이 연습했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는데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한미일 정상 사이의 대화에서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군요.

물론 극우파 아베의 이때까지 소행은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종군위안부나 야스쿠니 신사에 관한 그의 발언과 행보는 이웃나라들을 무시하는 짓거리이지요. 그런 정치가가 나라를 지도하고 있으니 일본이 잘될 턱이 있겠습니까.

브란트와 같은 독일의 정치지도자들은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관계를 잘 꾸려나감으로써 독일의 정치경제권을 확대발전시켰습니다. 일본지도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마도 일본 사회가 정체하고 있는 하나의 요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베라고 할지라도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는 실례를 범하는 것은 일국의 지도자가 취할 행태가 아니지요. 아니 일개 범부에게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입니다. 야단 칠 때는 따끔하게 야단치더라도 예의는 예의대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니 일본 네티즌들로부터 박대통령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지요.

몸살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회담에 참석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모르지만, 이왕 회담에 참석한 판에 그건 변명이 안 됩니다. 한국에서 맘에 안드는 아랫사람 대할 때 이른바 '레이저'라는 차가운 눈길을 던지거나 아예 무시하던 습성이 그대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자세로 앞으로 어찌 북한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메르켈은 박대통령과 만나서 북한사람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이지요. 이런 게 결여된 '통일대박론'은 정략적인 '통일한탕주의'에 불과합니다.

박대통령은 드레스덴에서 통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의 동질성 회복"을 주창했습니다. 하나 같이 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김대중-노무현정부가 추구했던 노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 그것도 꾸준한 실천입니다.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박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곧 통일이 오는 것처럼 들떴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던가요.

남한은 그걸 이용해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했습니다. 국민의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하고 영구총통제로 나아간 것이지요. 통일을 빙자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그 허수아비 기구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늉만 한 것이지요. 북한도 주석제를 신설해 1인 독재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북한은 주석제 이전에도 이미 노동당-김일성 독재체제였습니다. 따라서 7.4 공동선언의 영향은 남한에 비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반면에 10월 유신은 남한에서 불완전하지만 그런대로 작동하던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것이니까요.

7.4 공동선언이 북한에선 정치체제의 양적 악화로 이어졌다면 남한에선 질적 악화로 이어진 셈입니다. 그러므로 7.4 공동성명의 악용은 박정희정권의 경우가 더 심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한 대화도 얼마 안 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징조는 사실 7.4 공동성명 직후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박정희는 성명발표 직후 직접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향하지 않고 수감되어 있던 남파간첩들에 대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향시키라고 했습니다.

남파간첩들 중에는 사상이 투철해서 전향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북녘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해 전향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에 와서 무슨 공작을 벌이기도 전에 체포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종의 미수범에 불과한데도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또다시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해서 고통을 가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게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이건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행위였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었을까요.

통일을 내걸었다면 북녘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북쪽을 상대해야 하므로 우리 쪽을 순수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7.4 공동성명의 화해정신에 따른다면 오히려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할 사람들에게 불법적으로 살인적 고문을 가했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될까요. 물론 그 희생자가 수백명 수천명에 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박정희가 7.4 공동성명에 임한 자세를 잘 드러냅니다.

그런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어떨까요. 드레스덴의 발표 내용은 김대중-노무현 노선을 따른 것이라 별로 탓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아베와의 대화 태도를 보면 역지사지하는 자세를 전혀 보여주지 않지요.

또한 드레스덴 선언 전날의 ARD 인터뷰에서는 북한의 핵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명박 노선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쿠오바디스, 박근혜"란 말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지요.

박정희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보수-수구파 대통령들 역시 통일 이슈를 들고 나오는 걸 좋아했습니다. 예컨대 전두환은 1981년에 북한 방문 용의를 표명했고, 1985년에 또다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습니다. 그에 따라 북쪽의 허담이 서울을 방문했고, 남쪽의 장세동-박철언이 평양을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은 다음과 같은 친서를 전달하기까지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 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놀랍습니까. 명분에 집착하는 진보-개혁파들과는 달리 보수-수구파들은 실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발언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리적으로 충분히 써먹었다 싶으면 내가 언제 그랬냐 하는 식으로 쉽게 표변합니다.

박정희-전두환-김영삼 모두 정략적인 '통일한탕주의'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추진하다가 정략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수틀리거나 하면 금방 폐기해 버렸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결국엔 과거 수구-보수 대통령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옛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버선발 뒤꿈치도 밉다"고 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은 저로선 옛말에서의 이런 마음자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박대통령이 잘 하는 것도 애써 폄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감안하면서 계속 읽어 나가면 되겠습니다.

박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내걸자 거기에 내용과 과정이 없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내용이랍시고 김대중-노무현 노선을 일부 도입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과정'은 빠져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몇 가지 북한관련 사업을 벌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꾸준히 추진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북한이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체제라면 남쪽정권에 문제가 있더라도 남북한 관계는 그럭저럭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는 있지만, 시대착오적인 왕조체제입니다. 그들과 상대하려면 진정성과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박정권에게 그런 게 있을까요.

19세기 말 독일의 보수파 지도자 비스마르크는 오늘날 독일의 토대가 되는 사회보장제도를 창설했습니다. 미국의 보수파 대통령 닉슨은 핑퐁 외교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개선했습니다. 보수파가 진보적-화해적 정책을 취한 유명한 역사 사례들이지요.

마찬가지로 박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걸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엔 '퍼주기'라는 식의 반발도 훨씬 작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진보파가 의제를 빼앗겼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 진보정치세력의 설 자리가 좁아지더라도 남북한 7500만 인민의 삶이 나아지면 그게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진정성이 없어 보이니까요. 선거 때 써먹은 경제민주화-복지 공약도 당선되고 얼마 안 되어 내던져 버렸습니다. 기초단체 정당공천공약 폐기 같은 건 이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요.

진정성이 없으면 제대로 된 비전이 있을 리 없고 일관되게 밀고 나갈 수 없습니다. 북한과의 대화협력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내던질 것입니다. 벌써 그렇게 일이 어긋날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박대통령의 독일 발언을 '아낙네' 어쩌고 하면서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걸 보십시오. 이건 남북한 사이의 대화채널이 요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북한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동의해 주었는데 그 뒤에 뭔가가 꼬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리 되면 이명박 때처럼 '북한 정권 붕괴'만을 기다리면서 세월을 낭비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지요. 혹시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앞으로 몇 가지 사업을 벌인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협력기조가 지속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통일 대박론은 통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7.4 공동선언이 일단 그와 비슷한 긍정적 기능을 수행한 이후에 유신으로 이어지고 남북한 관계가 중단된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 박대통령은 그런 박정희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박대통령은 아버지와는 달리 유신체제와 같은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87년 민주화를 격은 국민의 민도가 이미 박정희 시대의 부활을 꿈꿀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통일 이슈를 적당히 정략적으로 이용하고선 내팽개칠 위험성은 존재합니다. 그걸 제가 "유신 시대 흉내내기"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만약에 박대통령이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남북한 인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찌될까요. 본인의 당면한 정치적 입지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취임 이후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간첩조작 사건 등에 대해 나 몰라라하고, 또한편으로 자신의 중요한 선거공약들을 깔아뭉개는 반민주적 정치행태를 보십시오. 이런 정권에서 '통일 대박론'이나 '드레스덴 선언'이 '통일 한탕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실 '대박'이라는 표현 자체가 '한탕' 해먹고 튀는 도박의 느낌을 주는 단어이지요. 쿠오바디스!

*이 글은 김기원 교수의 블로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