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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8일 13시 2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9일 14시 12분 KST

대통령과 슈퍼 히어로: part 2 | 대통령과 불편한 진실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9] 대통령과 슈퍼 히어로: part 2

─ 대통령과 불편한 진실


미국 만화 역사에서 골든 에이지와 실버 에이지로 불리던 시대인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이나 소련과의 우주 경쟁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통령은 자국을 외세의 위협에서 지키고 세계 1등 국가로 이끄는 리더로서 찬양을 받았다. 지난주 소개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나 존 F. 케네디처럼 이 시대의 대통령은 슈퍼 히어로 만화에서 핵무기 암호만큼이나 최고 기밀인 히어로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며, 국가 비상사태를 발호하여 전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영웅을 하나의 팀으로 규합해 조국에 봉사하도록 하는 '슈퍼 히어로 위의 슈퍼 히어로'로 그려졌다. 슈퍼 히어로들은 대통령의 호출 한 번이면 어떤 의심이나 의문도 없이 즉시 그 임무를 수행했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미국의 깃발이 나부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슈퍼 히어로 만화의 독자는 서서히 더는 그런 대통령을 원치 않게 되었다.


자나 깨나 대선 생각, 탐욕의 대통령 닉슨.

세계 대전 시대의 창작자들이 은퇴하고, 전후 세대 작가들이 만화계로 뛰어들면서 슈퍼 히어로 만화에서 그려지는 대통령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졌다. 이들 젊은 창작자에게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는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안긴 대표적인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으로, 워터게이트 사건과 그로 인한 대통령직 사임이 결정적이었다. 슈퍼 히어로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던 세계 최고 대통령의 이미지는 닉슨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 시대의 위협은 사실 예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미국과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들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미국이 보유한 비밀 무기와 슈퍼 히어로들을 내보낸다. 그런데 마블의 '판타스틱 포' 같은 히어로들은 대응이 조금 다르다. 대통령의 대처 방식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자꾸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바다의 왕인 네이머가 미국 동부 해안을 쓸어버리겠다며 아틀란티스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닉슨 대통령은 전쟁을 하려 하지만, 판타스틱 포는 대화와 설득을 주장하여 이를 무마시키는 데 성공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1972년 6월의 《판타스틱 포》 123호에서는 우주의 절대적인 존재 중 하나인 '갤럭투스'가 지구에 나타나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는데, 닉슨은 미국의 모든 미사일 포대를 열어서 미사일을 쏟아 붓지만, 판타스틱 포는 지략을 발휘하여 갤럭투스의 우주선을 탈취한 후 그의 명예심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뛰어난 협상 전술로 지구를 구해낸다.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닉슨은 '다음 대선의 승리'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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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투스와 싸우는 판타스틱 포 멤버들 사이에, 전화기를 붙들고 역정만 내고 있는 닉슨의 모습이 보이는《판타스틱 포》 123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marvel.wikia.com/wiki/Fantastic_Four_Vol_1_123?file=Fantastic_Four_Vol_1_123.jpg)


닉슨 대통령은 1974년 8월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는데, 마블은 1974년 1월 《캡틴 아메리카》 169호부터 같은 해 8월 176호까지 이어진 '비밀의 제국' 스토리아크를 통하여 대통령을 철저히 무너뜨려 버린다. 내용인즉 이렇다. 어느 날 캡틴 아메리카가 음모에 빠져서 범죄자로 몰리고,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 사이에 그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때 '문스톤'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캡틴 아메리카를 응징하고 대중의 히어로로 등장한다. 한편 '비밀의 제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백악관을 차지하고 미국에 항복을 요구하고, 너무나도 막강한 기술력과 무기 앞에서 미군마저 자포자기한 상황에서 미국 최고 히어로로 급부상한 문스톤이 비밀의 제국 리더와 결전을 벌인다. 결국 문스톤은 미국 국민 앞에서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선언하는데, 사실 문스톤은 처음부터 비밀의 제국과 결탁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은 비밀의 제국 리더인 넘버원이 미국을 독차지하여 자신의 제국을 만들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다른 히어로와 힘을 합쳐서 문스톤과 넘버원을 막는 데 간신히 성공하지만, 넘버원의 정체가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빠진다. 이후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종교·정치색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펼치며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라는 이상을 대표하는 히어로여만 한다고 결심하고 그동안 입고 있던 미국 국기 도안의 코스튬을 벗어 던지고 '노마드'라는 새 코스튬을 입게 된다. 이로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동일시되던 시대에도 마침표가 찍히나 싶었으나, 역사는 그런 행운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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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캡틴 아메리카이길 그만두겠네... 영원히!" 방패와 코스튬을 내던지는 스티브 로저스의 모습이 충격적인 《캡틴 아메리카》 176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marvel.wikia.com/wiki/Captain_America_Vol_1_176?file=Captain_America_Vol_1_176.jpg)


성조기 휘날리며! 진솔한 매력과 패권주의. 로널드 레이건.

1980년대 냉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으며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으로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은 루즈벨트의 영웅 대통령과 닉슨의 악인 대통령, 두 모습 모두를 가진 인물로 그려졌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슈퍼 히어로 역시 대통령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여기던 골든 에이지의 모습과, 대통령에게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꼈던 닉슨 시대의 모습을 다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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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냉전 시대 미국의 고민이 투영된 《레전드》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Legends_Vol_1_1?file=Legends_1.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우선 꼽아볼 수 있는 작품은 1986년 DC 코믹스의 6이슈짜리 크로스오버 미니시리즈인 《레전드》다. 이 이야기는 아포칼립스의 대악당인 다크사이드가 지구에 자신의 부하를 잠입시킨 후 현란한 웅변술로 지구인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웅변술에 지구 히어로들은 한순간 대중의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실수로 악당을 죽인 샤잠(캡틴 마블)은 한 순간에 최악의 살인마요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배트맨과 로빈은 분노한 군중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해 로빈이 처참한 부상을 입게 된다. 악의 마왕에게 파견되어 대중을 선동하러 온 전문 선동가, 그에게 휘둘려 지금까지 자신들을 구해 주었던 히어로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 레이건 대통령은 폭도를 더는 좌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규모가 너무나 크다보니 국민의 뜻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슈퍼 히어로 활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대통령 직권으로 내리고 국민과 히어로의 결집을 호소한다. 슈퍼맨 역시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불변의 지지를 보내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그에게 이렇게 답한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전적으로 복종하겠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자들은 사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정부에서 범죄자들을 은밀히 선발하여 만든 '수어사이드 스쿼드'였다. 제 기능을 못하는 히어로를 대신해 정부에서 조직한 비밀 팀이 인류를 분열시키는 사악한 선동 세력을 제거했던 것이다. 이 팀의 역사를 잠깐만 보충 설명하면 루즈벨트 대통령이 결성했고 지난 연재글에서도 나왔던 팀인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는 전쟁 후인 1951년 가면 뒤의 정체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이에 슈퍼 히어로들은 공개를 거부하는 한편 팀을 해체하고 히어로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그제서야 미국이 히어로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는 부랴부랴 이들을 대체할 팀을 급조하기 시작하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존재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부활이 그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1960년에 중단되었다가 《레전드》에서 초인들을 대체할 팀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레이건의 승인을 받게 된다. 이렇게 레이건이 과거의 강한 리더십을 지닌 대통령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인 것은 그가 주장한 '강한 미국의 부활'을, 한편 동시에 은밀하게 악인들과 결탁하는 모습은 레이건 정부가 이란에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 얻은 이익으로 니카라과의 반군을 지원했던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또 하나의 만화는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다. 이 만화에서도 레이건은 그렇게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진 못했다. 혼란에 빠진 미국을 구하겠다면서 폭력과 약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 제한적 계엄령을 내리는 한편, 국민들에게 이렇게 연설하며 안심시킨다. "우리는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서 일어서야 합니다.... 신이 우리 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미국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여전히 접니다."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의 결집을 호소하는 대통령. 그러나 소련의 도발로 미국이 대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나마 고담만은 배트맨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있자, 대통령은 하수인인 슈퍼맨을 배트맨에게 보내어 자신의 통치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대중 앞에 과시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의 역사적인 대결전이 벌어진다. 국민의 안전보다는 자기 통치 체제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레이건의 모습은 온 몸을 성조기로 칭칭 감고 있는 모습으로 더욱 희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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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를 원합니다. 물어보면 압니다." 프랭크 밀러가 그려낸, 성조기를 몸에 두른 채 어딘가 허황되고 우스꽝스러운 미국의 모습.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