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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05일 12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06일 14시 12분 KST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슈퍼 히어로와 정치인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7]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슈퍼 히어로와 정치인


지난 연재글에서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원작 만화를 설명을 하면서 렉스 루터 이야기를 했었다. 그중에는 지구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인간이며 슈퍼맨의 힘을 갈망한 나머지 그를 한없이 증오하고 파멸시키려 했던 자, 슈퍼맨을 없애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거짓말을 만들고 함정을 팠던 대악인 렉스 루터가 어이없게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재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도 이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눈앞에 앞두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 중 선거와 정치인을 그리고 있는 작품 몇 편을 소개할까 한다.


2012년 미국 대선. 되살아난 좀비 대통령들과 데드풀

정치와 선거는 미국 만화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자 흥미로운 이벤트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12년, 마블 코믹스에서는 새로이 《마블 나우!》 데드풀 시리즈를 론칭하면서 그 첫 번째 스토리 아크로 역대 미국 대통령을 부활시켰다.

테러 등 안보의 큰 위협을 겪고, '시빌 워'로 좌우가 나뉘어져 이념 대결이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 경제가 실패해 거리에 홈리스가 넘쳐나는 미국. 보다 못한 S.H.I.E.LD. 출신의 한 강령술사가 흑마술로 전직 대통령들을 부활시킨다. 지난날 조국이 처했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고 국민을 잘 살게 해 주었던 전설적인 대통령을 부활시킨다면, 미국도 회복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가 나 해리 트루먼의 영면을 방해하느냐!"

"대통령이여 이 나라를 고쳐 주소서!"

그리하여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율리시스 그랜트, 체스터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즈벨트, 워런 하딩, 캐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1789~1989년까지 200년간 미국을 통치하였던 대통령 거의 대부분이 죽음에서 되살아난다. 좀비로 부활한 그들은 엄청난 초능력으로 무장하고, 총체적 난국에 이른 미국을 파멸시키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되살린 과거의 영웅이 오히려 미국을 더 큰 위협 속에 빠뜨리게 된 격인데, 좀비라지만 대통령을 죽이는 일에 여론상 히어로들을 출동시킬 수 없는 S.H.I.E.LD. 대신 정치의 '정'자에도 관심 없던 우리의 슈퍼 악동 데드풀이 이 난리통에 뛰어들게 되고, 좀비 대통령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밟고 터뜨리고 자르고 썰고 내동댕이치면서 미국을 위기에서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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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대통령에게 한 방, 그의 애견한테도 한 방. 불사의 데드풀이 좀비 대통령들을 퇴치(?)하는 《마블 나우! 데드풀》 3호 표지.

(이미지 출처http://marvel.wikia.com/wiki/Deadpool_Vol_3_3?file=Deadpool_Vol_3_3.jpg)


2008년 미국 대선에서 DC 코믹스의 결정.

2008년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존 맥케인이 대권을 놓고 경쟁하던 당시에 DC 코믹스에서는 《DC 유니버스: 디시전》 이라는 4이슈짜리 미니시리즈를 출간했다. 4명의 정치인이 대권 후보로 경쟁 중인 상황에서 정치 혐오자의 무차별 테러가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이 후보자 보호에 나선다. 문제는 저스티스 리그 자체가 정부 산하의 조직도 아니고 자발적인 자경단의 모임이다 보니, 후보자를 전담하는 팀을 짜는 데 반발이 있더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후보자가 마음에도 들지 않을 뿐더러 그의 정책을 지지하지도 못하겠는데, 어떻게 그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다. 이를 받아들여서 다시 담당을 배정한 뒤, 히어로들이 현장에 투입되자 언론이 기회라도 만난 듯 카메라 세례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이때 폭탄 테러 시도가 실제로 일어나고, 그린 애로우가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한 순간에 미디어의 초점은 그린 애로우에게 집중되고, 그린 애로우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이 보호한 후보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여기서 사단이 난다. 슈퍼 히어로라고 하는 대중적인 아이콘이 한번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하자, 후보자들의 선거 캠프에서 너도나도 슈퍼 히어로를 자기 진영으로 섭외하려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범죄와의 싸움,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마음 한뜻으로 활동해 왔던 우리 히어로들. 알고 보니 다들 정치색이 다양해도 참 다양하다. 더구나 정체를 감추고 산다는 죄 아닌 죄를 지은 몸인 까닭에 그간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상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정치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생각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 당했던 히어로들이 한을 풀듯이 자신의 성향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기 시작한다. 빅센, 헌트리스, 파워걸, 체인질링, 와일드캣, 플라스틱맨, 파이어스톰, 호크맨, 그린랜턴 가이 가드너, 브루스 웨인, 원더우먼, 블루 비틀, 블루 데블, 플래시 제이 게릭, 플래시 월리 웨스트 등등 수많은 히어로들이 인터뷰를 통해서 특정 후보의 지지 선언을 하는 가운데, '저 히어로는 저럴 줄 알았어.' 싶었던 히어로부터, '저 사람,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저럴 줄은 몰랐는데?' 싶은 발언들이 속속 튀어나오고, 히어로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런 정치적 성향의 차이는 결국 인신 공격과 몸싸움까지 불러일으키는데, DC 유니버스에서 둘도 없는 우정을 자랑하는 그린 랜턴과 그린 애로우마저도 주먹다짐을 벌인다. 그린 랜턴은 연인인 블랙 카나리를 놓아두고 바람을 피웠던 그린 애로우의 과거를 들춰내면서, 연인에게도 신뢰를 지키지 못한 자가 어디서 신뢰를 운운하느냐고 비난하고, 그린 애로우는 과거 그린 랜턴이 패럴랙스가 되어 그린 랜턴 군단을 괴멸시키고 우주를 위협했던 일을 들추면서 그를 비난한다.

그런 가운데 테러범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야기는 권력 교체의 수단으로 선거라는 방식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지, 정치 혐오로 선거 제도를 테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라든지, 서로의 정치색을 존중하면서 비난과 증오를 멈추고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만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든지 하는 교훈적이고 설교적인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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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공화당인가 민주당인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각기 현실과 엮이게 된 슈퍼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담긴 《DC 유니버스: 디시전》 4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C_Universe:_Decisions_Vol_1_4?file=DC_Universe_Decisions_4.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시장이 된 슈퍼 히어로. 엑스 마키나

슈퍼 히어로를 정치 현장에 직접 던져놓은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만화가 브라이언 K 본의 『엑스 마키나』이다. 이 만화 시리즈는 한때 '그레이트 머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범죄자를 잡는 일을 하던 미첼 헌드레드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는 9/11 사태 당시 비행기가 뉴욕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던 현장에 있었고 그 충격적인 비극을 막으려 뛰어들었으나, 결국 히어로라는 것이 사회 전체를 바꾸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이를 계기로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뉴욕 시장에 출마한다.

이제 히어로의 코스튬을 벗고 시장이요 정치인으로서의 직함을 얻은 그 앞에는 이라크 전쟁, 동성 결혼, 대마초, 사형제도 등 정치적으로 찬반이 갈리는 실질적인 문제들이 던져진다.


로비스트 브루스 웨인, 대통령감 배트걸

정치력 하면 우리의 배트맨 브루스 웨인도 사실 뒤지지 않는다. 밤에는 범죄 투사 배트맨으로 활동하지만, 그가 낮에 쓰는 또 다른 이름인 브루스 웨인 또한 배트맨 못지않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분투하는 인물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99년 1월 연재되었던 《배트맨》561호에서 찾을 수 있다. 고담 시가 대지진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브루스 웨인은 피해 복구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함을 알고 정부를 설득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떠난다. 물론 원했던 대로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거의 한 이슈에 걸쳐서 '고담을 왜 복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감명 깊은 긴 연설을 했던 브루스 웨인의 모습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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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웨인, 미국 의회 의사당에서 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다. 1939년 고전 영화의 제목을 오마주한 "브루스 웨인 씨 워싱턴에 가다"이슈가 실린 《배트맨》56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561?file=Batman_561.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실제로 그는 1987년 《디텍티브 코믹스》 573호에서는 매드 해터를 유인할 목적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고담 시 시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다. (바로 다음 이슈인 《디텍티브 코믹스》 574호는 『배트맨 앤솔로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로빈이 부상을 입고 등장하는 이유가 573호에서 매드 해터에게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시로 짧은 기간 고담 시장이나 상원의원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배트맨 세계에서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캐릭터 중의 하나는 역시 배트걸이다. 배트걸은 자경단 활동만으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회의원이 되었던 적이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앞선 연재글, '여성 히어로의 시대: 배트걸을 주목하라 1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대체 세계 버전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