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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29일 12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3월 01일 14시 12분 KST

뉴 52 배트맨에 이어진 한 천재의 족적 | 스티브 잉글하트와 『가족의 죽음』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2] 뉴 52 배트맨에 이어진 한 천재의 족적

─ 스티브 잉글하트와 『가족의 죽음』


지난 연재글에서 (뉴 52) 『배트맨 3: 가족의 죽음』에 그려진 조커의 모습이 배트맨 역사 속 어느 만화에서 가져온 것인지 몇 가지 소개하였는데, 오늘은 거기에서 미처 다 이야기 못 했던 조커의 왕실 태피스트리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한다.


배트맨 역대 최고의 작가들

배트맨 역사를 훑어보면 대표 작가로 불리는 인물이 1대인 빌 핑거, 1970년대 배트맨 재탄생에 큰 공을 세운 데니스 오닐, 1990년대 『나이트폴』부터 『노 맨스 랜드』까지 거대 이벤트의 중심에 있었던 척 딕슨, 2000년대 이후 그랜트 모리슨과 뉴 52의 스콧 스나이더, 그리고 『배트맨: 이어 원』과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통해 모던 배트맨의 역사를 다시 쓴 프랭크 밀러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런데 『가족의 죽음』에 나오는 조커의 왕실 태피스트리에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한 명의 전설적인 작품이 오마쥬되어 있는데, 바로 『배트맨: 웃는 물고기』의 작가 스티브 잉글하트다. 단 여덟 이슈의 이야기로 가장 '완벽한 배트맨'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잉글하트. 그의 이야기는 1970년대 마블의 우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마블 코믹스

1977년,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가 전 세계를 열광시켰을 때, 뉴욕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마블의 작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렸던 세계가 영화로 나왔어!' 그들이 루카스보다 앞서 만화에서 구현했던 우주 세계의 모습을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것이다.

사실 「스타워즈」의 탄생 배경에는 마블 코믹스가 있었다.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영화 개봉 전에 시나리오를 들고 스탠 리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이야기는 유명한데, 당시 「스타워즈」 만화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를 설득해 만화화를 진행했던 인물이 로이 토머스였다. 로이 토머스는 스탠 리의 뒤를 이어 1970년대 마블을 이끈 명 편집자이자 스토리 작가, 그리고 미국 만화 매니아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 당시 마블은 1960년대 실버 에이지의 인기가 한풀 꺾이면서 새로운 콘텐츠를 필요로 하던 차였고, 로이 토머스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로버트 E. 하워드 원작의 소드 앤 소서리 소설 「야만인 코난」 시리즈를 만화화해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출판된 스타워즈 만화 시리즈는 영화화 전의 원작 시나리오와 컨셉 아트 몇 장에 불과한 자료에서 출발해 만화만의 세계를 완성해 갔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한 솔로의 또 다른 모험담 등은 만화팬과 영화팬을 모두 열광시켰고, 스타워즈는 마블 최고의 인기 시리즈가 되었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이렇게 스타워즈가 마블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70년대 초중반 마블이 꾸준히 우주 세계와 우주의 영웅들을 탐구한 노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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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서 2014년까지 다크 호스 코믹스에서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디즈니가 조지 루카스 필름을 인수하면서 다시 마블에게 돌아오게 된 새 스타 워즈의 표지들.

스파이더맨, 엑스맨과 맞먹는 마블의 새로운 효자 상품이 되었다.

(사진 제공: 시공사)


마블 코믹스의 우주 세계, 캡틴 마블, 타노스, 스타 로드

마블 우주 세계의 시발점이 된 캐릭터는 로이 토머스의 캡틴 마블이다. 원래 캡틴 마블의 아버지는 로이 토머스가 아니라 스탠 리였는데, 1968년 스탠 리가 창작했으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던 이 캐릭터는 1969년에 로이 토머스가 《캡틴 마블》 17호부터 펜을 넘겨받아 스토리를 써나가면서 마블을 대표하는 우주 히어로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만화는 과거 포셋 코믹스의 인기 만화 캡틴 마블(오늘날 DC의 샤잠)이나 1980년대 앨런 무어의 《미라클맨》(원래 이름은 마블맨) 시리즈처럼 소년과 성인 영웅이라는 두 명의 다른 인물이 하나의 몸을 공유하는 설정으로 나간다. 쉽게 말하자면 몸을 공유하는 것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서로 이어져 있어서 한 명이 여기에 존재하면 다른 한 명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대기해야 하는 체계이다. 두 사람이 한 세계에 동시에는 존재할 수 없고, 주문을 사용하거나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 형태로 서로 공간을 바꿔 가면서 활동을 한다는 시스템이다. 그렇게 캡틴 마블은 지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조국인 크리 제국에게 등을 돌린 지구 최강의 영웅으로, 마블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마블 우주 세계의 두 번째 키워드인 타노스의 창작자는 배트맨 시리즈 중 『패밀리의 죽음』의 작가로도 유명한 짐 스탈린이다. 1973년에 《아이언맨》 55호를 통해 데뷔한 이 캐릭터는 본래 DC코믹스의 우주 악당인 잭 커비의 다크사이드를 본 따 만든 캐릭터였는데, 권력과 죽음에 대한 광적인 애착, 권력을 위해 부모마저도 비정하게 살해하는 잔인함을 지닌 사이코패스로 진화한다.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는 1976년 《마블 프리뷰》 4호로 세상에 모습을 선보인 스타 로드다. 최근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인공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주연으로 대두한 이 스타 로드의 원작자가 바로 스티브 잉글하트이다. 또한 행성 포식자 갤럭투스가 두른 장벽에 갇혀서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닥터 스트레인지, 네이머, 헐크 등과 함께 디펜더스의 멤버로 활동하던 실버 서퍼가 마침내 갤럭투스의 장벽을 뚫고 우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게 만든 인물 역시도 스티브 잉글하트였다. 실버 서퍼가 우주로 모험을 시작하면서 우주의 탄생과 행성의 소멸에 관련된 여러 갤럭투스급 캐릭터들이 마블 세계에 선을 보인다. 여기에 또 한 인물 닥터 스트레인지도 등장한다. 잉글하트는 지금도 가장 훌륭한 닥터 스트레인지 작가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데,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스승 에인션트 원이 가졌던 '소서러 슈프림'의 지위를 물려주며 모험의 범위를 우주 탄생, 존재의 비밀과 관련된 거대한 캐릭터로 진화시킨다. 후대에 앨런 무어, 닐 게이먼, 그랜트 모리슨 같은 명작가들이 초인과 우주, 마법과 관련된 환상적인 세계들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도 스티브 잉글하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외에도 쿵푸 영화가 인기를 끌던 시대적 배경에 맞춰 동양인 캐릭터 '상치'와 '맨티스' 등을 만들었는데, 맨티스는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가장 대표적인 우주 영웅의 한 명으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런 퍼즐 조각들이 후대에 서로 이어지고 짜맞춰지면서 만들어지는 거대 이벤트들이 바로 《인피니티 건틀렛》이나 《어나일레이션》 같은 스토리라고 보면 된다. 그 배경에는 로이 토머스부터 시작해서 잉글하트, 그리고 스타워즈로 이어지는 마블 우주 세계의 폭발적인 성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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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우주 진출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토대를 닦은 스티브 잉글하트의 《마블 프리뷰》 4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marvel.wikia.com/wiki/Marvel_Preview_Vol_1_4?file=Marvel_Preview_Vol_1_4.jpg)


1970년대 마블 최고의 작가가 DC로 넘어온 사연.

그뿐인가, 반전 운동이 한창이던 사회 분위기로 인기가 떨어져 폐간 위기에 놓인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넘겨받아서 6개월 만에 마블 최고의 타이틀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도 바로 잉글하트였다. 그런데 당대 만화 팬들의 가장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았던 이 작가는 1976년에 돌연 만화계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은 DC에게 기회로 돌아온다. 1976년 28살의 나이로 DC 코믹스의 발행인이 된 자넷 칸은 휴식을 위해 외국 여행을 떠나려던 잉글하트를 붙잡아 DC에 스토리 몇 편만 써달라고 부탁을 한다. 잉글하트는 떠나기 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원래는 스토리 작가가 그림을 맡을 만화가들과 전화로라도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면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도, 일정이 촉박했던 잉글하트는 만화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누가 그려도 자기가 상상했던 그대로 그릴 수 있도록 세밀한 대본을 빠른 속도로 써서 넘기고는 유럽으로 떠나 버렸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디텍티브 코믹스》 469~476호, 여덟 이슈의 배트맨 스토리였다. 이 여덟 이슈를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가 바로 조커의 왕실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웃는 물고기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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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 왕실 태피스트리에 실린 그림의 출처인

《디텍티브 코믹스》 475호 본문.(가운데 왼쪽 컷)

해변에 잡혀온 웃는 물고기들이 배트맨의 숙적, 범죄계의 광대 왕자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comixology.co.uk/Detective-Comics-1937-2011-475/digital-comic/23174)


잉글하트의 배트맨

웃은 얼굴의 물고기로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있는 어부의 그림은 잉글하트의 《디텍티브 코믹스》 475호에 등장한다. (참고로 『배트맨 앤솔로지』에 수록된 '튕겨나온 명중탄'편이 바로 이 앞 이슈인 《디텍티브 코믹스》 474호이니, 잉글하트의 스토리가 어떤 분위기고 어떤 느낌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배트맨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으로 불리는 실버 세인트 클라우드라든지 훗날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주요 멤버로 활약할 수 있도록 데드샷이라는 캐릭터에 새로운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 모두 잉글하트의 솜씨다.)

이야기는 조커가 해안에 조커 독을 풀어 웃는 얼굴의 물고기들이 낚이면서 일어나는 말썽들인데, 여기에서 그려지는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 배트맨과 조커라는 캐릭터에 관한 묘사 등이 실은 『가족의 죽음』에 그려지는 배트맨과 조커의 뿌리라고 볼 수도 있다. 잉글하트는 총 여덟 편의 배트맨 이슈에서 배트맨의 정체를 아는 휴고 스트레인지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를 하나의 주제로 이어가는데, 조커는 거기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배트맨의 정체의 비밀이 풀리는 것을 원치 않아. 그러면 내 재미가... 나의 완벽한 적과 벌이는 시합의 스릴이 사라질 테니까! 배트맨은 내 꺼야! 나 조커야 말로 배트맨을 상대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지! 역대 최고의 범죄자이신 이 몸께서 고작 경찰 따위와 어울린다면 아무 재미도 없잖아?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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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의 물고기를 감염시켜서 그것으로 저작권료를 받는다?

가장 창의적의고 기괴한 조커의 악행을 다룬 작품으로 팬들에게 손꼽히는

《디텍티브 코믹스》 475호 표지.

이 작품은 배트맨 더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에도 실려 있다.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475?file=Detective_Comics_475.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궁중 광대 조커

『가족의 죽음』에서 마구간 장면, 왕실 태피스트리에 이어 등장하는 조커의 궁중 광대 장면 역시 잉글하트의 배트맨 이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배트맨의 정체를 아는 휴고 스트레인지는 브루스 웨인을 낮에는 웨인 기업이라는 제국의 통치자로 고담 위에 군림하고, 밤에는 배트맨이 되어 고담을 통치하는 인물, 사실상 고담의 '왕'으로 묘사한다. 《디텍티브 코믹스》 476호에서 조커는 그런 '왕'인 배트맨과 대비해서 자신을 궁중 광대로 묘사하며 이런 말을 남긴다.

'넌 조커를 이길 수 없어. 옛날에는 궁중 광대가 존경을 받았어. 광대들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왕들도 그 자유를 부러워했지!'

배트맨과 조커의 미묘한 관계, 왕과 궁중 광대, 스콧 스나이더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둘의 관계를 다시 잘 정리하고 파헤쳐서 뉴 52 배트맨 시리즈 속에 한 땀 한 땀 담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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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 배트맨의 모습이

『가족의 죽음』 속 장면들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디텍티브 코믹스》 476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476?file=Detective_Comics_476.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