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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15일 13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15일 14시 12분 KST

뒤집힌 페이지, 혼돈의 미로 | NEW52 배트맨에 영향을 준 인물 열전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0] 뒤집힌 페이지, 혼돈의 미로

─ NEW52 배트맨에 영향을 준 인물 열전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의 배트맨 시리즈 첫 작품인 『올빼미 법정』. 이 책을 받아든 독자들이 하나같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배트맨이 올빼미 법정의 미로를 헤매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멀쩡하던 페이지가 한 장을 넘기면 90도로 회전해 옆으로 누워 있고, 또 한 장 넘기면 완전히 뒤집어져서 내용을 읽으려면 책을 손에서 돌려 가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는 인쇄가 잘못된 거 아니냐며 전화를 할 정도였다. 미국에서 책을 출판할 당시에 그렉 카풀로에 대한 DC 편집부의 반응도 비슷했다. 페이지를 뒤집는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분명히 인쇄 오류라고 오해할 거야! 하지만 기발한 발상이긴 해! 그래서 처음에 허락했던 것이 중간에 번복되어 급기야 카풀로도 뚜껑이 열리고 만다. 왜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몰라보는 거야! 그런데 실은 이런 사연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성공적인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뒤집힌 페이지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편집자이건 최후에 책을 읽는 독자이건 간에 모두 미로 속에서 배트맨이 겪는 혼란을 똑같이 경험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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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돌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

독자뿐만 아니라 서점에서도 세미콜론 편집부에

인쇄 오류 확인 전화가 오곤 했던 『올빼미 법정』 본문.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어쨌건 어둠의 미로 속에서 서서히 엄습해 오는 공포를 표현한 이 뒤집힌 페이지들은 사실 만화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결코 낯선 일도 아니었다. DC는 우여곡절 끝에 이 모험을 허락했지만, 마블 코믹스였다면, "그래 이거야! 이런 시도야말로 뉴52이라는 새 시대의 새 시리즈에 가장 걸맞은 시도지!" 라며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같은 경험을 한 번 한 적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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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는 내가 원조지.”

적 요새를 탐색하는 닉 퓨리의 상황을 미로같은 패널 배치로 나타낸

《스트레인지 테일즈》166호 본문.

(이미지 출처: https://s-media-cache-ak0.pinimg.com/236x/44/32/ce/4432ce8bd883a447fbb20fb156fa5215.jpg)


뒤집힌 페이지의 역사는 일명 만화계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불렸던 작가, 만화 속에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팝아트, 옵티컬 아트 등 현대 미술의 요소를 적절히 도입하여 미술학도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만화에서 찾게 하고, 만화라는 매체의 현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짐 스테랑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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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와 팝 아트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스테랑코의 1969년 《캡틴 아메리카》111호 본문.

(이미지 출처: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06/bb/b6/06bbb6e8fcca54ba4f12770d1742a55a.jpg)


짐 스테랑코

이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분도 있을 수 있으니, 잠깐 짐 스테랑코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 될 것 같다. 그는 슈퍼 히어로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1938년에 태어나, 만화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1960년대 만화계를 발칵 뒤집은 인물이다. 초창기 미국 만화 작가들을 보면 마블의 아버지 '스탠 리'나 만화의 왕 '잭 커비'처럼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돈을 위해서 만화계로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초창기 만화계를 보면 무작정 잘나가는 만화가 밑에 들어가서 도제식으로 일을 배운 케이스가 아니면, 예술 학교에 진학해서 광고업계 등에서 큰 성공을 거두려 하다가 그 좁은 문을 뚫지 못하고 만화계로 온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특별한 사례들이 몇몇 있었는데, 예를 들어 원더우먼의 아버지 윌리엄 마스턴 박사는 심리학 박사이자 거짓말 탐지기의 발명가, 여성 인권 운동가로 만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실험하기 위해서 원더우먼 만화를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흔히 '덕후'라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돈 대신 오로지 '덕'을 목적으로 SF를 탐독하고, 현재와 비교하면 원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통신 기술이 낙후된 시대에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소식을 전하며 팬클럽을 결성하고 팬 매거진을 만들어 급기야 슈퍼 히어로 만화의 편집자로 덕업일치의 길을 걸었던 줄리 슈왈츠 같은 선구자적인 편집자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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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교육적 효용을 입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랑으로 싸우는 여성 영웅 원더우먼.

그녀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1941년 《올 스타 코믹스》 8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All-Star_Comics_Vol_1_8?file=All-Star_Comics_8.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짐 스테랑코도 만화가 이전에 마술사이자 탈출 전문가 등으로 활동을 하다가 1966년 마블 코믹스의 《스트레인지 테일즈》라는 만화 잡지를 통해서 혜성처럼 나타난 케이스인데, 표지만 작업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총 29편의 만화를 남겼으나 그를 통해서 만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특출한 경력과 천재성을 두고 만화계의 지미 헨드릭스, 혹은 만화계의 스탠리 큐브릭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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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의 표지 오마쥬들.

많지 않은 만화를 남기고 북커버 일러스트레이션과 출판업이라는 길을 택했지만,

그는 회사와 시대를 초월해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www.littlestuffedbull.com/images/comics/separated/agentsL.jpg)


1966년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당시 마블의 편집자 스탠 리였다. 그는 스테랑코가 가져온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뒤에 꽂혀 있는 만화책 중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 그건 굉장한 말이었다. 1966년이면 《판타스틱 포》와 《헐크》, 《스파이더맨》 등으로 마블이 만화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고, 사실상 스탠 리와 잭 커비 최고의 전성기였다. 당시 마블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잭 커비가 맡고 있었는데, 커비의 작품을 하나 빼서 짐에게 넘겨줘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스테랑코가 다른 잘나가는 모든 타이틀을 제쳐두고 고른 것이 바로 《스트레인지 테일즈》였고, 이 잡지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날 사뮤엘 잭슨이 분한 카리스마 넘치는 슈퍼 스파이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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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커비의 레이아웃을 연필화와 펜화로 마무리하며 스테랑코가 처음으로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 참여한 《스트레인지 테일즈》15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marvel.wikia.com/wiki/Strange_Tales_Vol_1_135?file=Strange_Tales_Vol_1_151.jpg)


미로와 패널 뒤집기의 원조.

그는 이 시리즈에서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는데, 대표적인 하나가 만화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말풍선과 이야기 박스가 전혀 없이 오직 그림만으로 닉 퓨리가 적의 기지에 은밀하게 잠입하는 장면을 몇 페이지에 걸쳐서 전개한 것이었다. 요즘에야 그런 시도가 낯선 것이 아니지만, '그림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글을 우겨넣던 시대에 스테랑코의 시도는 혁명적이었다. 또 하나는 적 기지에 잠입한 닉 퓨리가 어마어마한 미로를 헤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장면이었는데, 스테랑코는 페이지의 각 패널들의 테두리에 마치 퍼즐 잡지에 나오는 것과 같은 미로들을 그려서 한 패널을 빠져나와 미로를 통과해 다른 패널로 넘어가는 식으로 독자의 시선을 유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 페이지는 사각형의 패널들이 회오리치면서 뒤집혀 독자들이 카풀로의 『올빼미 법정』과 마찬가지로 책을 뒤집어서 읽어야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페이지는 말풍선을 뒤집지 않아서 책을 뒤집어 읽을 필요는 없었지만, 가운데 그린 원을 중심으로 각 패널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면서 닉 퓨리가 서 있는 바닥이 거꾸로 뒤집히도록 페이지를 구성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더 궁금하신 '덕후' 분들이라면 2015년 1월에 3회에 걸쳐 KBS에서 방영된 '세상의 모든 다큐' - 슈퍼 히어로 3부작을 보면 스테랑코 본인의 진술을 통해서 관련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 미라클

마블에서 처음으로 함께한 만화가이기도 했고, 애초에 마블에 들어오기 전부터 잭 커비의 열광적인 팬이기도 했던 스테랑코는 곧 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여러 면에서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수시로 산책과 식사를 하면서 만화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마술사였던 스테랑코가 커비의 집에 놀러 가면 아이들이 '스테랑코' 삼촌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마치 한 가족이 된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만화 캐릭터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DC 코믹스의 '미스터 미라클'이다. 마블에서 토르와 아스가르드의 신화 속 세계에 심취하던 잭 커비는 마블을 뛰쳐나온 후에 DC에서 '제4세계'라는 이름으로 DC만의 신화를 창조하는데, 여기에는 DC코믹스 최악의 우주 악당이자 훗날 마블의 타노스의 모델이 되기도 한 '다크 사이드'를 비롯해 구약 성경의 모세가 모델인 '하이 파더', 지옥의 행성 '아포칼립스'와 낙원의 행성 '뉴 제네시스'의 대결 등이 등장하였고 나중에는 그 핵심 인물 중에 다크 사이드의 아들이지만 뉴 제네시스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오리온과 뉴 제네시스 태생이면서도 지옥 행성 아포칼립스에 보내져 '탈출'의 명수로 성장하는 미스터 미라클과 그의 아내인 빅 바르다 등이 각자 개인 타이틀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때 잭 커비가 미스터 미라클의 모델로 삼은 사람이 바로 스테랑코였고, 빅 바르다의 모델은 아내 로즈였다. 스테랑코라는 특별한 경력을 가진 만화가와 수시로 저녁을 함께하며 온갖 마술 이야기들을 듣지 않았더라면 우주 최고의 탈출 달인이라는 특별한 발상은 아마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와 신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크 사이드와 제4 세계의 이야기 역시 배트맨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출판된 만화 중에 『슈퍼맨 배트맨: 슈퍼걸』을 읽어 보면 배트맨이 빅 바르다 등과 함께 아포칼립스로 가서 다크 사이드와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번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예고편에서도 다크 사이드를 상징하는 오메가 문양이 비쳤고, 만화 원작에서도 배트맨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다크 사이드인 만큼 고담 밖에서 벌어지는 배트맨의 우주적 활약상이 궁금한 팬들은 관심을 가져 봐도 좋을 듯하다.


영상 중간의 날개 달린 괴물들은 배트맨의 상상일까? 아니면 다크사이드의 부하 파라데몬일까? 3월 23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예고편.

(영상 출처: http://tvcast.naver.com/v/639147)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