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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18일 11시 1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18일 14시 12분 KST

세계 최고의 탐정이 있기까지 | 배트맨의 뿌리를 찾아

만화책 등장 이전에 20세기 초반 미국 소년들은 값싼 갱지로 만들어진 소설 모음집인 '펄프 매거진'을, 그 이전에는 '다임 노블', '스토리 페이퍼' 등을 즐겨 읽었다. 형식은 약간씩 달라도 우리식으로는 '소설 잡지' 정도로 보면 될 듯한데, 이 중에 배트맨의 원조로 꼽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1882년 12월 16일자 《뉴욕의 소년들(The Boys of New York)》 383호에 수록된 '검은 옷의 사나이(Man in Black)'이다.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7] 세계 최고의 탐정이 있기까지

─ 배트맨의 뿌리를 찾아 (1/2)


범죄자들과 맞서 싸우는 어둠의 기사 배트맨. 75년 이상을 이어져 온 이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만화를 뛰어넘어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전설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그 전설의 기원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밥 케인, 빌 핑거 등 배트맨의 창작자들로부터 시작해 그랜트 모리슨과 스콧 스나이더 같은 현대 작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뿌리는 과연 과거의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창작자 본인은 물론 만화 원작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배트맨의 뿌리는 만화책이라는 미디어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 신문 가판대를 장악했던 '펄프 매거진'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적할 배트맨의 뿌리는 그보다 조금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이와 아울러 배트맨의 역사와 함께 색다르게 즐겨 볼 수 있는 소설과 영화도 몇 편 소개하려 한다.


검은 망토의 원조 '맨 인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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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하고는 관련 없음!

망토 두른 십자군의 시초로 평가받는 '검은 옷의 사나이'가 실린 《뉴욕의 소년들》 표지.

(이미지 출처: http://40.media.tumblr.com/854a8dbde2d74a370180997598663b47/tumblr_mm00tu5YV11rz7gf4o1_540.jpg


만화책 등장 이전에 20세기 초반 미국 소년들은 값싼 갱지로 만들어진 소설 모음집인 '펄프 매거진'을, 그 이전에는 '다임 노블', '스토리 페이퍼' 등을 즐겨 읽었다. 형식은 약간씩 달라도 우리식으로는 '소설 잡지' 정도로 보면 될 듯한데, 이 중에 배트맨의 원조로 꼽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1882년 12월 16일자 《뉴욕의 소년들(The Boys of New York)》 383호에 수록된 '검은 옷의 사나이(Man in Black)'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소속된 비밀 조직에서 배신자의 누명을 쓰고 잔혹하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이 조직의 멤버는 모두가 검은 망토, 검은 중절모와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다. 주인공의 살해를 주장한 '넘버 텐'이라는 인물은 이후 회의를 주관하여 비밀 조직의 리더가 되는데, 그가 권력을 잡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오싹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죽은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멤버들은 공포에 질려서 달아나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살해될 당시의 피 묻은 복장 그대로 넘버 텐에게 달려들어 복수를 시작한다.


부자 주인공과 히어로의 표식

1903년에 희곡으로, 1905년에 소설로 선보인 바로네스 오르치 여남작의 『스칼렛 핌퍼넬(The Scarlet Pimpernel)』 역시 배트맨의 원조로 꼽힌다. 이야기의 배경은 17세기 프랑스 파리.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대다. 주인공인 퍼시 블레이크는 영국 귀족이자 뛰어난 검술가로, 공포정치에 희생당해 단두대에서 사형당할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별봄맞이꽃이라는 뜻의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인물로 변장한다. 그는 평소에는 바람둥이 귀족 행세를 하고 지내다 은밀히 사람들을 돕는데, 활약한 자리에 별 모양의 꽃이 새겨진 메모를 남겨 두고 사라진다.

세상 걱정 없이 사는 상류층 한량이 기이한 표식을 남기며 약자를 돕는 이야기 중 스칼렛 핌퍼넬의 계보를 이어 배트맨에게로 이어지는 또 한 명의 인물은 1919년 펄프 소설 작가 존스턴 맥컬리가 창작한 '조로'다. 그의 소설 『카피스트라노의 재앙'(The Curse of Capistrano)』에서 주인공 돈 디에고 베가는 캘리포니아 스페인 식민지의 귀족이었는데, 15살 때 이웃 노인들이 군인에게 고초를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는 광경을 보고는 그들을 돕겠다고 결심하여 승마와 검술을 익히기 시작한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그는 마스크와 망토를 착용하고 '조로'(스페인어로 여우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약자들을 돕기 시작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세상일에 아무 관심 없는 한량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무기로 채찍과 검을 사용하였고 활약이 끝난 뒤엔 칼로 Z마크를 남겨 두고 떠났다.

브루스 웨인 역시 이들처럼 상류층 인사이면서 약자를 돕는 일을 하였으며, 초창기였던 1939년부터 범죄자를 잡으면 박쥐 날개가 찍힌 편지에 그의 죄상을 낱낱이 적어 고담 경찰서 앞에 던져 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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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월드에서 일어난 브루스 웨인의 씻을 수 없는 상처에도 영화 「쾌걸 조로」가 연관되어 있다.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낭만 협객으로 추앙받던 공공의 적

하지만 맨 인 블랙, 스칼렛 핌퍼넬, 조로는 배트맨의 무대인 20세기 초 미국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있었다. 배트맨은 이들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취하였으나, 정작 대공황 시대가 배경인 도시의 히어로라는 요소는 1930년대를 주름잡던 전설적인 은행 강도 '존 딜린저'가 제공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공황의 책임이 은행에 있다며 지탄하고 있었고, 존 딜린저의 은행털이는 범죄가 아닌 부패한 사회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영웅시되었다. 영화 제작사들도 그런 흐름에 부응하여 갱단을 민중의 영웅처럼 그리는 영화들을 만들어내었다. 1931년 영화 「공공의 적(The Public Enemy)」에서 제임스 캐그니가 연기했던 톰 파워스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고든 국장과 브루스 웨인의 양면을 다 가진 딕 트레이시

한편,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이런 시대에 반기를 든 사람도 있었다. 1931년에 신문 연재만화 《딕 트레이시》를 통해 새로운 범죄 투사의 전설을 만들어 낸 체스터 굴드가 그랬다. 이야기는 딕이 약혼녀 테스 트루하트의 집을 찾아가면서 시작되는데, 집에 느닷없이 총을 든 강도들이 들어온다. 강도의 요구를 거절하던 예비 장인은 총에 맞아 죽고, 같이 저항하던 딕은 머리를 맞아 기절한다. 강도들은 약혼녀 테스를 납치해 가고, 예비 장모는 충격으로 쓰러진다. 의식을 차린 딕은 예비 장인의 시체 앞에서 복수를 서약하고 사복 경찰이 된다. 그렇게 그는 테스를 구해낸 후에도 범죄와의 전쟁을 계속해 나간다. 체스터 굴드는 경찰이 범죄자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내가 그럴 능력이 되는 인물을 직접 창작하겠다면서 이 만화를 만들었고, 사복 경찰 딕 트레이시와 대비되는 기이한 외모의 악당들을 통해 사회의 적에게 감상적인 동정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며 만화를 홍보했다. 1990년 워렌 비티 주연의 영화 「딕 트레이시」의 흉악한 악당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캐릭터들이다.

뉴52 《배트맨》 만화에서도 고담 전체가 범죄 소굴이 되고, 모든 경찰이 범죄자들과 같이 어울리고, 심지어 도시의 주요 인사 대부분이 레드 후드 갱단의 멤버가 되는 무법적인 상황이 그려진다. 그런 가운데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경찰 제임스 고든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비극을 겪는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는 체스터 굴드가 보여 주었던 딕 트레이시의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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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처럼 첨단 기기를 사용하고, 고든 경찰국장처럼 강직하게 도시의 악과 싸웠던 남자 딕 트레이시.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Dick_Tracy#/media/File:Dicktracy1961cartoon.jpg)


범죄와의 전쟁

이런 와중에 1933년, 마침내 미국 정부가 FBI의 위상을 강화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FBI와 에드거 후버 국장은 영화사들의 범죄자 미화에 분노하고 있었고, 이들의 입김이 들어간 작품이 1935년 워너브라더스의 「G 맨」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공공의 적」의 주연을 맡았던 제임스 캐그니가 FBI 요원으로 등장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갱스터들이 부패의 상징이 된다. 미디어는 더 이상 갱을 낭만 협객으로 미화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다시 법의 수호자를 영웅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 주연의 2009년작 영화 「퍼블릭 에너미」를 통해서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존 딜린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조니 뎁은 범죄자 영웅(존 딜린저), 크리스천 베일은 법집행자 영웅(멜빈 퍼비스)으로서 배트맨이 탄생하던 시대의 변화하던 영웅상을 각자 절반씩 보여 주고 있다.


애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

1930년대 펄프 매거진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애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가 배트맨에 미친 영향도 잠깐 정리하고자 한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배트맨: 이어 원』,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제로 이어』 등에서 그려진 배트맨의 탄생 장면을 아는 팬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이 작품들에서 브루스 웨인은 유리창을 깨고 날아든 박쥐가 아버지 토머스 웨인의 흉상 위에 앉은 모습을 보고 박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포가 1845년에 발표한 「까마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주인공의 방 안에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75년 스테판 말라르메가 번역한 프랑스어판 「까마귀」에 실린 에두아르 마네의 삽화는 1939년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와 1940년 《배트맨》 1호에서 웨인의 창에 박쥐가 날아드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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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삽화가 들어간 책으로는 최초로 평가받는 프랑스어판 「까마귀」에 실린 에두아르 마네의 삽화와 만화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탄생기인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이미지 출처: 왼쪽 : http://arttattler.com/Images/NorthAmerica/NewYork/Morgan%20Library/Edgar%20Allen%20Poe/4.jpg, 오른쪽: 세미콜론)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