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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7일 12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07일 14시 12분 KST

여성 히어로의 시대 | 배트걸을 주목하라. 1편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1] 여성 히어로의 시대

─ 배트걸을 주목하라. 1편


'나는 히어로만 사귀어요'

최근 인터넷에서 DC코믹스의 라이센스를 받은 티셔츠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한 티셔츠는 슈퍼맨과 원더 우먼이 공중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뉴52) 《저스티스 리그》 12호의 표지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런데 원래 표지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다. 만화책에서는 원더 우먼이 자신의 무기인 '진실의 밧줄'로 슈퍼맨을 묶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고, 슈퍼맨 또한 그런 원더 우먼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인데, 이 티셔츠에서는 원더 우먼의 손에서 밧줄을 제거했다. 그 결과 슈퍼맨은 원더 우먼을 끌어안고 있지만, 원더 우먼은 수동적인 모습을 취하는 포즈가 탄생했다. 더구나 추가된 말풍선에는 "득점!" 이라는 문구 등이 들어가면서 원더 우먼이 갖는 강인하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남성의 소유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런 일은 배트맨 티셔츠에서도 일어났는데, 십대 소녀용으로 제작된 티셔츠에 "배트맨의 아내가 되려고 훈련받는 중."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또한, 전체 문구에서 '아내'는 이탤릭체를 사용해서 강조했다. 소비자들은 여자아이에게 배트맨의 신부 지망생이라는 명찰을 달아 주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로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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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는 원더 우먼을 '차지'하며 여자 아이는 배트맨의 '신부'가 되라는 이미지를 담아 물의를 빚었던 티셔츠와 (뉴52) 《저스티스 리그》 12호의 표지.

(이미지 출처: http://goo.gl/w0fXgQ)


유아복 또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 남아용 유아복에는 "미래의 맨 오브 스틸(슈퍼맨)", 여아용에는 "나는 히어로만 사귀어요."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갓난아기 옷에마저 남자의 시선을 끄느냐의 여부로 여성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편협한 문구를 넣는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하다. 차라리 '미래의 원더 우먼'이라고 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냉장고 속 여자들


'냉장고 속 여자들'이라는 장 제목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그린 랜턴 할 조던이 그린 랜턴 군단을 괴멸시킨 『그린 랜턴: 에메랄드 트와일라잇』 직후 최후의 반지는 지구의 청년 카일 레이너에게 계승된다. 카일 레이너에게는 알렉산더 드위트라는 매력적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등장한 지 4 이슈 만에 악당의 손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새로운 그린 랜턴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이유로 그린 랜턴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 그녀를 살해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레이너는 냉장고 속에 구겨져 있는 여자친구의 시신을 보고 오열한다.

히어로 만화에서 히어로의 여자 친구가 강간당하고, 살해되고, 혹은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헤로인이었던 그웬 스테이시는 그린 고블린의 손에 다리에서 떨어지는 과정에서 사망했다.(『어메이징 스파이더맨: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 매트 머독의 여자 친구였던 카렌 페이지는 마약에 중독된 채 킹핀의 음모에 빠진다.(『데어데블 본 어게인』) 그린 애로우의 여자 친구이자 블랙 카나리라는 이름의 히어로이기도 한 디나 랜스는 마약 조직을 쫓다가 붙잡혀 처참한 고문을 당한다.(『그린 애로우: 롱보우 헌터스』) 일롱게이티드맨의 아내인 수 딥니가 저스티스 리그의 본부에서 악당에게 강간당한 사건은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을 충격에 빠뜨렸다.(『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이들 여자 주인공들이 겪는 비극은 히어로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소비되었다.

카일 레이너의 여자 친구가 냉장고 속 시신으로 발견되는 내용이 연재되던 1999년, 만화 팬이었던 게일 시몬은 '냉장고 속 여자들'이라는 제목의 웹사이트(http://lby3.com/wir/)를 만들고 남자 히어로의 이야기를 전개할 목적으로 강간, 살인, 고문, 능력 박탈 등의 상황에 처하는 여자 주인공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남자 주인공들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여성들. 그녀들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과연 타당할까? 그녀가 던진 묵직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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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극 중 장치로 사용된 죽음. 하지만 꼭 그 대상이 여성이어야만 했을까? 《그린 랜턴》 53호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http://lby3.com/wir/alex-kyle.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게일 시몬은 이후 만화 작가가 되어서 《버즈 오브 프레이》(2003~2007), 《원더 우먼》(2008~2010), 《배트걸》(2011~2014), 《레드 소냐》(2014) 등 여성 히어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들을 주로 맡으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오늘은 그녀의 배트걸을 중심으로 그간 배트걸이 여성 캐릭터로서 어떤 대접을 받아 왔는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남자 히어로의 짝으로 탄생한 배트걸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바버라 고든의 배트걸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간략히 정리하자. 배트맨 시리즈는 1950년대 들어 프레드릭 웨덤의 책 『순수의 유혹』을 통해 동성애물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배트맨을 모방한 게이 캐릭터(워런 엘리스 원작 『어소리티』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미드나이터)가 당당히 솔로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2015년 현재와는 상당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 당시 DC코믹스에서는 배트우먼과 배트걸을 각각 배트맨, 로빈과 짝지어 줌으로써 논란을 피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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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법적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다룬 와일드스톰 사의 『어소리티』 1권 표지.

이 세계관은 이후 DC 유니버스에 편입되어, DC 굴지의 게이 캐릭터가 된 미드나이터는 《그레이슨》 등의 스핀오프에서 딕 그레이슨과 만나기도 했다.

(사진 제공: 시공사)


이때 배트우먼은 캐시 케인, 배트걸은 베티 케인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애초에 동성애 논란을 잠재우는 것만이 목적이다 보니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는 어느새 배트맨 만화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논란이 된 티셔츠의 문구처럼 진짜 배트맨과 로빈의 아내가 되는 것이 이 시기 배트우먼과 배트걸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절묘하게도 텔레비전에서 배트맨 TV 드라마가 대히트하게 되고, 드라마 프로듀서가 여성 시청자를 끌어들일 목적으로 DC코믹스에 제임스 고든의 딸을 배트맨과 로빈의 동료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 아이디어에 따라 바버라 고든이 배트걸로 데뷔하게 되었다.(당시 드라마에서 바버라 고든 역할을 했던 배우 이본 크레이그는 2015년 8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1960년대 데뷔한 바버라는 1980년대 중반 DC가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로 세계관 정리를 단행할 때까지 근 20년간을 꾸준히 인기를 누리며 활약하였다. 지난 7회 연재글인 '로빈, 대학에 가다 - 청년 딕 그레이슨과 미국 학생 운동'(https://www.huffingtonpost.kr/kyuwon-lee/story_b_8507532.html)에서 딕 그레이슨이 1960년~1970년대 미국 대학계의 현실을 그렸다면, 바버라 고든은 감옥에 가서도 뉘우치지 않고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들을 보고는 배트걸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아예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당히 정계에 진출한다. 최근의 그래픽 노블에는 세계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목적으로 미국 국방성 장관부터 S.H.I.E.L.D. 국장 자리에까지 오른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나, 전직 히어로 출신으로 뉴욕 시장이 된 『엑스 마키나』의 미첼 헌드레드처럼 정치를 통한 변혁에 나서는 인물들이 종종 있지만,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이 고작 3퍼센트였던 1970년대에 젊은 여성으로서 정계에 진출하는 모습은 시대를 앞서가는 시도였다.

이 무렵 바버라는 배트맨의 조연이 아닌 독립된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심지어 《배트맨 패밀리》라는 만화 타이틀의 주연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때 《배트맨 패밀리》의 인기는 DC의 대표 타이틀인 《디텍티브 코믹스》를 능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올드팬 중에는 정치인으로서 바버라의 활약이 계속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꽤 있다. 그녀가 정치 경력을 계속 이어갔다면 렉스 루터처럼 미국 대통령 자리까지도 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든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이후 바버라의 비중은 확실하게 줄어들어 급기야 1988년에는 배트걸 은퇴까지 거론되기에 이른다.


무엇을 위해 비극을 겪었나.


그런데 그해 앨런 무어가 바버라 고든을 자신의 그래픽 노블에 나오게 해 달라고 DC에 요청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전환점을 맞는다. 그 작품은 바로 오늘날 배트맨 시리즈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배트맨: 킬링 조크』였다. 『킬링 조크』에서 바버라 고든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어느 날 바버라의 집에 찾아온 조커는 그녀를 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옷을 모두 벗긴 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알몸을 사진으로 찍어 아버지인 고담 시 경찰국장 제임스 고든에게 보낸다. 그러니까 바버라 고든은 그저 제임스 고든을 괴롭히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 셈이었다.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를 포착한 『킬링 조크』라는 걸작을 위해 비극의 소모품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냉장고 속의 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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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몇십 년 동안 바버라 고든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한 『배트맨: 킬링 조크』에서 조커의 총격 장면.

(사진 제공: 세미콜론)


그렇게 배트걸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고 마는가 싶었는데. 얼마 뒤에 그녀는 '오라클'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전문가로서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지원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곧 배트맨 패밀리부터 저스티스 리그까지 DC의 모든 히어로가 그녀의 천재적인 컴퓨터 실력을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컴퓨터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한 1990년~2000년대에 바버라가 오라클로서 보인 활약은 굉장했다. 그녀는 심지어 '버즈 오브 프레이'라는 여성 히어로 팀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이 이야기는 2002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라클은 DC 내에서 바버라 고든 이외에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장애인 히어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그녀가 사용하던 배트걸의 이름은 2대째 배트걸인 헬레나 버티넬리를 거쳐 오라클 자신이 직접 발탁한 '카산드라 케인'이라는 소녀에게 넘어간다. 세계 최고 암살자의 딸인 카산드라 케인의 배트걸 역시 큰 인기를 얻어서 DC의 베스트셀러 타이틀이 되었고, 그 와중에 바버라는 케인의 멘토가 되어 그녀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맡는다.(카산드라 케인의 이야기는 9회 연재글 '학대받은 아이들의 도시 - 고담의 슈퍼 악당, 그들의 유년 시절' 편을 참고.)

이렇듯 남자 히어로의 짝일 뿐이었던 존재로 태어났으나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으로 맹활약을 펼치며 독립하고, 또 두 다리를 못 쓰는 상황에서도 장애를 극복한 히어로의 아이콘으로, 여성 히어로 팀의 리더로, 어린 영웅의 멘토로 일어서는 바버라 고든의 모습은 그녀가 가진 히어로로서의 능력과 잠재력의 증거가 되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편에서 계속)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