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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30일 11시 5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30일 14시 12분 KST

심리 분석, 명상, 권투, 닌자술, 그리고 암살 권법 | 배트맨의 스승들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0] 심리 분석, 명상, 권투, 닌자술, 그리고 암살 권법

─ 배트맨의 스승들


이번 글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동하기 전, 그가 세계를 떠돌며 어떤 스승을 만나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를 알아본다.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귀띔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 초반부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각기 다른 배트맨 만화에서 많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여러 스승, 장소, 그들과 만나는 특별한 기연(奇緣)들이 마치 퍼즐처럼 영화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최근 출판된 (뉴 52)『배트맨 4: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에 수록된 단편에는 브루스 웨인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났던 또 다른 스승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이전 배트맨 시리즈의 스승과 뉴52 세계의 그들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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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4: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에서 알아보는 브루스 웨인의 '그때 그 시절' 『배트맨 4: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 본문에서.

(사진 제공: 세미콜론)


1. 하비 해리스


배트맨의 수많은 스승 중 데뷔 연도로만 놓고 보면 첫번째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55년 《디텍티브 코믹스》 226호에 처음 등장했다. 브루스의 부모가 아직 죽기 전, 브루스는 신문을 통해 명형사 하비 해리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나 범죄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배우려 했다. 1989년 《디텍티브 코믹스 애뉴얼》 2호에서는 브루스가 열일곱 살 때로 시점이 수정되어 하비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브루스는 노형사인 하비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다. 하비는 그를 데리고 다니며 살인 사건을 해결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데, 사망 직전 브루스에게 '내면의 분노를 다스려라.'라는 유언을 남긴다.


2. 헨리 듀카드


전설적인 사격술을 지닌 프랑스 출신의 해결사로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우 리암 니슨이 썼던 이름이다.(왜 '썼던 이름'이라고 말하는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설정은 원작과는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그는 1989년 《디텍티브 코믹스》 599호에서 등장했는데, 원래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인물이었다. 실력만은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각국 정보기관이나 인터폴도 두 손 든 테러리스트를 잡는 일을 하는데, 한 테러범을 추적하는 중에 우연히 브루스를 만난다. 브루스는 파리, 암스테르담, 독일 등 듀카드가 가는 곳마다 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설득한 끝에 그와 6주간을 동행하면서 범죄자의 심리 분석부터 정보 수집/분석까지 많은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듀카드가 테러범을 저격하려는 마지막 순간, 브루스는 살인은 자신의 규칙에 어긋난다면서 그의 곁을 떠난다.


3. 추친리


《디텍티브 코믹스》 599호에 소개된 또 다른 스승이다. 헨리 듀카드를 만나기 이전 브루스가 가장 먼저 찾아간 극동 지역의 스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친리는 수련으로 몸이 상한 브루스에게 침을 놓아 주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무술은 깨쳤으나 도(道)를 깨치지 못했다. 도(道)란 수련과 공부만으로 되지 않는 삶의 철학이자 완전한 유화(柔和)이다. 네가 떠나온 세상과 이곳 중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는 네게 더 가르칠 것이 없느니라." 브루스는 자신의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하면서 스승에게 인사하고 산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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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의 두 스승, 헨리 듀카드와 추친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디텍티브 코믹스》 599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599?file=Detective_Comics_599.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4. 쓰네토모


《디텍티브 코믹스》 599호에서 추친리를 떠나 온 브루스는 야쿠자인 쓰네토모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쓰네토모라는 이름은 일본 무사도의 고전 『하가쿠레』를 남긴 실존인물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 1659∼1719)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하가쿠레』에서는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올바른 삶으로 이어진다.'라고 가르치는데, 만화 속의 쓰네토모도 웨인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나는 자네를 존경하네. 웨인 상. 죽음을 청한다는 것은 서양인으로서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네. 자네 심장의 고동과 혈관 속 피의 흐름을 느껴 보게나.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알 때 시간에 통달할 수 있네. 시간이란 주관적이라 단 몇 초에 1년을 살 수도 있지. 시간을 우군으로 만들게나. 그러면 필요한 한 순간. 적의 마음을 꿰뚫고 그의 공격을 예상하며 그의 술수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그러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지." 브루스는 쓰네토모에게 무사도와 함께 신체의 부상을 빠르게 지혈하는 방법도 같이 배운다.


5. 키리기


1989년 《배트맨》 431호와 1990년 《세계 최고 슈퍼 히어로의 탄생기》 단편집 중에서 배트맨에 관한 이야기인 '추락하는 사나이' 편에 소개된 인물이다. 브루스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궁극의 무술을 익히기 위해서 며칠째 눈 덮인 설산을 헤매는데, 그곳은 바로 북한의 백두산이었다. 산속에서 키리기의 도장을 찾은 웨인은 사람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자 그 자리에 앉아 명상하며 기다린다. 3주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타난 키리기는 '이제 바닥을 쓸어도 좋다'고만 말한다. 브루스는 그렇게 한 달은 명상, 한 달은 청소, 또 한 달은 설거지를 하며 다섯 달을 보내고서야 키리기에게 무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는데, 11개월째 되던 날 그는 말한다. "너에겐 고통의 흔적이 있다. 그것으로 인해 고수가 될 수 있었으나 결국 그 때문에 파멸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것을 모두 잊어라. 그리하면 너를 파멸의 반대편으로 이끌어 주겠다. 거기에 20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웨인은 자신은 그럴 수 없노라 답하고는 스승에게 식사를 올리고 인사한 후 하산하여 듀카드를 찾아 프랑스로 떠난다. 《배트맨》 431호에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닌자들을 사부에게 배운 발경(發勁)으로 일격에 제압하는 배트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6. 샤오 라


1993년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전설》 52호에서 동양을 떠돌던 웨인은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도인의 소문을 듣고 티베트 고원 중부의 탕구라(唐古拉) 산맥에서 샤오 라 라는 여사부를 모신다. 그녀는 "도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로 시작해서 "생각을 비워라. 마음을 비워라. 매일 조금씩, 죽는 날까지 도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도다." "도란 만물을 관통하는 흐름이요 물살이요 바람이다."라고 하면서 어느 날 웨인을 연에 묶어 하늘로 날린다. 처음엔 두려워하던 웨인은 점점 바람과 하나가 되는 자신을 느끼고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샤오 라는 브루스가 궁금해하던 미래는 알려주지 않는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한 샤오 라의 가르침은 '도상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도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로 끝을 맺는다.


7. 시엔 탄


이어지는 《다크 나이트의 전설》 53호에서 미래를 알고 싶은 웨인은 샤오 라와 가까운 곳에 사는 시엔 탄이라는 다른 현인을 찾는다. 시엔 탄은 힘을 추구하는 인물로, 브루스를 보자마자 자신의 강력한 무공을 보여 주고는 짐승의 뼈로 보는 고대 중국의 갑골점(甲骨占)으로 그의 미래를 이렇게 말해 준다. "네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고난의 길이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할 것이나 그 안에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길은 보기에는 바르나 실은 뒤틀린 길이다. 너는 거기서 누구도 누리지 못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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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1부: 박쥐'와 '도 2부: 용'으로 구성된 이국적 느낌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전설》 52호와 53호. (그림은 브루스 웨인이 연을 타고 있는 52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52?file=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52.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8. 시한 마쓰다


지금까지의 동양 스승들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배트맨 만화의 등장인물이었다. 반면에 이번에 소개할 시한 마쓰다는 2011년 이후 뉴 52로 리런치된 DC 세계관에서 새로이 소개된, 즉 가장 현대적인 버전의 동양 스승이다.(시한이라는 이름도 사범(師範)의 일본어 발음에서 따왔다.) 2012년 《디텍티브 코믹스》 0호에 나오는 마쓰다의 이야기를 보면 시간은 배트맨이 추친리를 찾았던 때와 비슷한 10년 전의 과거다. 히말라야의 불교 승려 시한 마쓰다의 도장을 찾아간 브루스는 이번에도 스승의 허락을 받고자 눈을 맞으며 도장 앞에서 삼 일을 버틴 끝에 제자가 된다. 9개월을 같이 지내며 그는 스승에게서 친아버지와 같은 친밀감을 느낀다. 마쓰다는 브루스에게 (실제 존재하는)티베트 불교의 수련법인 통렌 호흡법과 투모 명상법을 가르쳐 준다. "너의 고통과 두려움은 검은 연기다. 그것을 들이마시거라. 그리고 찬란한 빛으로 바꾸어 전부 저들에게 내보내거라." 브루스는 반문한다. "저도 이 빛을 가지면 안 됩니까?" 스승은 "그 빛은 네가 가져야 할 것이 아니다. 너는 남을 지켜야 한다. 사랑과 연민은 너를 약하게 하고 너를 파괴할 것이다. 너 자신을 닫고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고 모두를 불신하여라. 그럴 때 너는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다." 라면서 브루스를 냉정한 전사로 만들어 간다.


9. 테드 그랜트


테드 그랜트는 골든에이지 시대에 탄생한 DC의 원로 히어로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JSA)의 핵심 멤버이자 헤비급 권투 세계 챔피언 출신이다. 챔피언이 된 이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전설적 복서인데, 살인죄 누명을 쓰고 쫓기던 끝에 스스로 누명을 벗기 위해서 '와일드캣'이라는 자경단이 되었다. DC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이라면 한 번쯤은 와일드캣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고 봐도 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1996년 《로빈》 31호를 보면 테드 그랜트가 현역일 당시 한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묻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1주일간 그에게 특별 복싱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이 1주일간 테드가 소년(브루스 웨인)에게 받은 교습료는 세게 타이틀전 대전료보다도 높았는데, 브루스가 1주일간 테드의 수업을 받으며 익힌 것은 '잘 맞는 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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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을 쓴 헤비급 권투 챔피언 테드 그랜트가 그린 랜턴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 낸 영웅 와일드캣. 그래픽 노블 『배트맨과 와일드캣』에서는 고담을 무대로 그와 배트맨이 활약한다.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and_Wildcat_Vol_1?file=Batman_Wildcat_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10. 리처드 드래곤, 레이디 시바, 데이비드 케인


리처드 드래곤, 레이디 시바, 데이비드 케인. 이 세 사람은 DC 무림계에서 절정 초고수로 알려진 인물들로 모두 배트맨의 스승이다.

먼저 리처드 드래곤을 보면, 학교에서 매일 얻어맞고 살던 리처드는 강해지기로 결심하고 벤저민 터너(훗날 브론즈 타이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무술 고수이다)와 함께 일본의 오 센세(O-Sensei)를 사사해, 6년 동안 최고의 무술가로 성장한 후에 미국에서 도장을 차린다. 하지만 워낙 수련 강도가 높다 보니 수련생은 1주일 만에 전부 도망가고 도장이 텅 비고 만다. 그때 최고의 스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도장을 찾아온 인물이 있으니 바로 브루스 웨인이었다.

9회 연재글에서 잠깐 소개되었던 레이디 시바(샌드라 우산) 역시 리처드 드래곤의 제자이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무술가' 중 한 명이다. 『배트맨: 나이트폴』에서 베인에게 허리가 부러졌을 때 브루스 웨인은 예전의 기량을 빨리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레이디 시바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2주 동안을 시바에게 얻어맞고 나서야 그녀의 주먹을 보고 반격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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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기량을 되찾기 위해 2주간 맞춤 속성 교육(?)을 받는 브루스 웨인. 『배트맨: 나이트폴』 본문에서.

(사진 제공: 세미콜론)


데이비드 케인은 '현존하는 모든(!) 무술의 달인이자 모든(!) 무기의 달인'이라고 소개되는 인물로 브루스 웨인에게 갖가지 기술을 전수한 바 있다. 최고의 암살 재능을 가진 자손을 얻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배우자가 레이디 시바였고, 이를 위해 그는 시바의 언니 캐롤린 우산을 살해한다. 레이디 시바는 언니의 복수를 하려 케인을 찾지만, 그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죽음 대신 자식을 낳아 주기로 한다.

두 명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인연인지 브루스는 훗날 데이비드 케인과 레이디 시바의 딸인 카산드라 케인을 만나게 된다. 카산드라는 일찍이 암살자로 교육받다 일곱 살 나이에 살인을 저지른 후 충격에 빠져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는데, 배트맨과 만났을 때 자신의 살인 기술로 배트맨에게 제압당한다. 나중에 배트맨은 카산드라를 배트걸로 거둔 후, 암살자로 키워진 탓에 공격밖에 모르는 그녀에게 방어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교육용 홀로그램 영상 CD를 준다. 그 안에 127가지의 무술이 입력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오니 수많은 스승에게 익힌 배트맨의 무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카산드라 케인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 9회 연재글인 학대받은 아이들의 도시 | 고담의 슈퍼 악당, 그들의 유년 시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