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10월 26일 07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6일 14시 12분 KST

배트맨의 첫사랑 | 줄리 매디슨

wikipedia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5] 배트맨의 첫사랑

─ 줄리 매디슨



탐정에서 공포의 복수자로

'세계 최고의 탐정' 배트맨. 그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보인 1939년의 《디텍티브 코믹스》 27호로 돌아가 보자. 그는 동업자를 차례로 죽이며 회사를 독차지하려던 살인범을 쫓는 탐정이었다. 28호에선 고든을 통해 보석 강도단의 정보를 입수한 브루스 웨인이, 강도단을 붙잡는 과정에서 범법자로 오해받고 그 오해를 풀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두 이슈에서 등장한 악당은 그저 평범한 범죄자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디텍티브 코믹스》 29호에서 '닥터 데스'라는 아주 특별한 악당이 하나 등장한다. 대머리에 외눈 안경, 뾰족한 수염을 기르고 흡사 램프의 요정을 연상시키는 '자바'라는 덩치 큰 하인을 거느린 이 '닥터 데스'는 이후 고담이라는 광기의 공간에서 광인과 대결을 벌이는 배트맨 모험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특히 29호에는 고담의 스카이라인 위를 비추는 거대한 보름달, 발코니 창문 밖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배트맨의 괴기스러운 모습, 벽에 비친 거대한 박쥐 그림자, 닥터 데스가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냉담하게 지켜보는 배트맨 등 훗날 '최악의 악몽'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배트맨의 공포스러운 면모를 최초로 시도하였던 수작이었다.


2015-10-24-1445671106-4685283-DC29.jpg

최초의 슈퍼 빌런, 닥터 데스가 등장한 《디텍티브 코믹스》 29호 표지. 그의 새롭고 충격적인 모습은 세미콜론의 뉴 52 배트맨 시리즈에서 곧 만나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http://batman.wikia.com/wiki/Detective_Comics_Issue_29?file=DC29.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30호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닥터 데스가 살아 돌아오는데, 2004년 짐 리의 『배트맨: 허쉬』에서 메인 악당이었던 허쉬처럼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등장한다.(물론 그는 배트맨에게 붙잡혀서 가짜 피부 아래 숨긴 괴물의 모습이 드러나고 만다.) 이 두 편의 닥터 데스 에피소드를 통해 배트맨 만화는 밤을 배경으로 배트맨이라는 공포의 존재가 '보통 범죄자와는 확연히 다른' 미친 괴물과 대결하는 구도로 방향을 잡아 갔다. 31호와 32호에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유럽의 음침한 고성을 배경으로 배트맨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상대로 싸우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최면에 납치까지 당한 여인: 줄리 매디슨의 첫 등장


《디텍티브 코믹스》 31호와 32호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인 줄리 매디슨으로, 바로 브루스 웨인의 약혼녀이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마스터 몽크'라는 자의 최면에 걸린 채 잠옷 바람으로 거리에 나와 한 남자를 살해하려 한다. 그 순간 배트맨이 나타나서 행인을 구하고, 그녀를 붙잡아 집으로 데려다 준다. 다음 날 그녀와 병원을 찾은 브루스 웨인은 어딘가 좀 이상한 의사에게 줄리를 유럽으로 휴양 여행을 보내라는 권고를 듣는다. 좀 황당하지만 그는 최면에 걸려 살인을 저지를 뻔한 약혼녀를 홀로 배에 태워 보낸다. 배트맨으로서 그녀를 몰래 따라다니며 지켜 주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이번엔 줄리가 마스터 몽크에게 납치를 당하고 배트맨은 파리 시내를 밤새도록 뒤져 줄리가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 그리곤 약혼녀를 위협한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들의 본거지인 헝가리의 고성으로 출동, 마침내 사건의 범인인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들을 찾아내 은탄환으로 쏘아 죽인다.


2015-10-24-1445671294-5088833-Detective_Comics_31.jpg

박쥐 vs. 뱀파이어? 유럽의 고성을 배경으로 괴기스럽게 배트맨이 서 있는 《디텍티브 코믹스》 3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31?file=Detective_Comics_31.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그다음 이슈인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는 고담의 뒷골목에서 한 강도의 손에 부모를 잃는 브루스 웨인의 탄생기가 마침내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후 브루스 웨인의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싸움은 휴고 스트레인지와 같은 미친 과학자와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38호에서는 갱단에게 부모를 잃은 소년 딕 그레이슨을 사이드킥인 로빈으로 받아들였고, 갱단을 소탕해 소년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36호와 39호에서는 먼 훗날 라스 알굴 같은 캐릭터는 물론 배트맨의 탄생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비의 동양 암살자 집단이 배트맨의 적으로 등장한다.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서 시작된 배트맨 이야기가 불과 십여 이슈 만에 도시를 장악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갱단, 전설 속 초자연적인 존재, 광기에 사로잡힌 추악한 외모의 광인, 동양의 암살자까지 그의 싸움을 대표하는 많은 요소를 차례로 덧붙여 갔던 것이다. 이때 배트맨이 소년들의 유년기를 빼앗아간 갱단을 상대로 철저한 보복전을 벌이는 응징자가 되게 한 매개체 격 인물이 로빈이었고, 배트맨을 공포와 광기의 세계로 이어 주는 역할을 한 존재가 바로 줄리 매디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줄리에서 포셔로: 캐릭터성의 변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에는 만화책이라는 새 미디어가 탄생하고 슈퍼 히어로 장르가 만화 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면서 '골든 에이지'라고 불렸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여성 주인공은 줄리 매디슨처럼 잔혹 범죄의 피해자로, 힘없고 불쌍하며 차표 하나 끊을 때조차도 남자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졌다. 악당이 여성을 어깨에 들쳐 메고 달리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히어로가 그녀를 구해서 들쳐 메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흔한 공식이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득시글대는 유럽의 고성으로 잡혀갔다가 구출되는 줄리 매디슨의 모습은 이런 여성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힘없고 수동적인 모습과는 반대로 당당히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전문성을 뽐내는 능동적이고 강한 여성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슈퍼맨의 여성 주인공인 로이스 레인이다. 로이스 레인은 1938년 세계 최초의 슈퍼 히어로 슈퍼맨이 처음 실린 《액션 코믹스》 1호에서 클라크 켄트의 동료 기자로 등장한 인물이다. 이 만화의 2호를 보면 클라크 켄트가 전쟁 현장에 취재를 가는데, 편집장 페리 화이트의 특별 지시로 로이스 레인이 켄트와 동행하게 된다. 기사에 로이스의 여성적인 손길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는데, 편집장이 남성과 여성의 업무를 차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호에서는 "이건 여자가 나설 일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화이트의 코를 납작하게 하기 위해 레인이 켄트에게 취재 임무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담이지만 슈퍼맨이 끊어진 철로를 바로 세워 기차를 지나가게 하고, 무너지는 댐 아래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죽을 위기에 놓인 로이스를 구하고, 환한 달밤을 배경으로 로이스를 끌어안고 공중 비행을 즐기며 그녀와 키스하는 장면 등,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영화 「슈퍼맨」의 명장면들이 바로 이 이슈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줄리 매디슨은 《디텍티브 코믹스》 41호부터는 대부호의 약혼녀라는 연약한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로이스 레인을 능가하는 당당한 여성으로서 이미지 체인지를 하게 된다. 이를 위해 작가들이 그녀에게 준 직업은 영화배우였다. 41호의 스토리는 주연 배우가 살해당하면서 그 역이 줄리 매디슨에게 넘어오고, 약혼녀가 살인범의 다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서 범인을 잡는다는 내용이다. 이때 등장한 악당은 투페이스의 원형이기도 한 초기 버전의 클레이페이스였다. 클레이페이스는 《디텍티브 코믹스》 49호에서 탈옥해 다시 범죄 행각에 나서는데, 이 무렵 줄리는 신문 일면 기사를 장식할 정도의 최고 스타로 성장해 포셔 스톰(Portia Storme)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포셔'란 원래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줄거리를 잠시 소개하면 이렇다. 베니스의 상인 바사니오가 부자 상속녀인 포셔에게 청혼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인 안토니오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못 갚으면 살 1파운드로 갚겠다.'라는 증서를 쓰고 비용을 마련해 준다. 덕분에 바사니오는 구혼에 성공하는데, 안토니오가 그만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증서대로 살 1파운드를 샤일록에게 떼 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포셔는 법학박사 차림으로 남장을 하고 '살을 자르되 피가 흘러서는 안 된다'라는 재치있는 대답으로 안토니오를 구한다. 복종과 순종을 강요받던 시대에 진취적인 행동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포셔란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는 사실부터가 그녀의 변화한 위상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고담 최고의 갑부를 퇴짜 놓기까지


대배우로 성장한 줄리 매디슨에게 브루스 웨인은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전한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스타야!" 줄리는 웨인에게 "당신도 한량으로 세월을 보내지 말고, 뭔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하고, 웨인은 "재미있는 놀 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일 따위를 하느냐."라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때까지도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비밀을 약혼녀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자 포셔는 브루스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당차게 파혼을 선언한다. "당신이 무슨 일이든 할 마음이 없다면, 약혼은 취소예요. 마음이 바뀌면 찾아와요."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재산을 보유한 남편이 아니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함께할 동반자를 원했기 때문에 웨인을 차 버린 줄리는, 이후 배우의 길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고 《디텍티브 코믹스》 49호를 마지막으로 수십 년간 배트맨 스토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골든 에이지 버전, 즉 지구-2 버전의 줄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줄리의 귀환은 그로부터 36년 뒤인 1977년 《월드 파이니스트 코믹스》 248호를 통해 이루어졌다. 브루스와 파혼한 이후 줄리의 삶은 대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삶을 모티브로 삼아서 창작되었다. 대 배우가 된 줄리가 어느 부유한 나라의 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었는데, 왕이 요절하면서 하루아침에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이 나라가 벌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브루스 웨인이 줄리를 만나러 특사로 파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줄리는 단지 브루스 웨인의 첫사랑만이 아니라 최초의 여성 로빈이기도 했다. 《디텍티브 코믹스》 49호에서 배트맨은 살인마 클레이페이스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줄리에게 로빈의 옷을 입혔고, 줄리와 로빈이 서로 역할을 바꿔 클레이페이스를 속인다.


2015-10-24-1445671451-7972582-untitled.png

대부호의 장식 인형 같은 삶보다는 자신의 꿈을 택했던 여성 줄리 매디슨.

그녀는 최초의 여성 로빈이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https://tygertale.files.wordpress.com/2014/06/wpid-photo-201406110808533.jpg?w=610&h=289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재미있게도 노년의 배트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나오는 배트맨의 마지막 로빈은 십대 소녀인 캐리 켈리이다. 1977년 최초의 여성 로빈이었던 줄리 매디슨이 그레이스 켈리를 오마주하며 화려하게 귀환했고, 그로부터 10년 뒤 배트맨의 귀환을 다룬 스토리에서 켈리라는 이름의 소녀 로빈이 등장했다는 것. 배트맨의 첫사랑과 노년의 배트맨이 가장 아꼈던 소녀가 모두 로빈이었던 사실 모두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긴 해도 재미있는 대목이다.


2015-10-24-1445672223-7585382-WP_20151024.jpg

은퇴한 배트맨이 다시 받아들인 '마지막' 로빈 캐리 캘리. 「배트맨 대 슈퍼맨」 영화에 과연 그녀가 등장할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세미콜론)


초창기 배트맨의 현대적 각색: 매디슨과 웨인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한 지구의 위기》 크로스오버 이벤트로 DC의 평행 우주 세계관이 리부트된 이후 줄리가 배트맨 세계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2006년 매트 와그너의 《배트맨과 괴물인간》, 《배트맨과 매드 몽크》였다. 각각 여섯 이슈 분량의 이 만화는 앞서 소개한 《디텍티브 코믹스》 29호부터 49호까지의 이야기, 즉 광인과 초자연적인 존재로 진화하는 배트맨의 악당 세계와 함께 브루스 웨인과 줄리의 사랑 이야기를 그대로 현대적으로 재설정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배트맨의 히스토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도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 이 두 권이다.

한편으로 매디슨과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두 사람의 더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곧 정식 출간될 스콧 스나이더의 뉴 52 『배트맨 5: 제로 이어 - 어둠의 도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관심 있는 팬이라면 골든 에이지 배트맨, 매트 와그너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배트맨, 그리고 스콧 스나이더가 새롭게 쓴 배트맨 셋을 읽으며 비교해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뉴 52 『배트맨』 시리즈를 제외하고 나머지 둘은 아직 국내에 출간된 것이 없다. 『배트맨 앤솔로지』가 초창기의 몇 이슈를 수록하고 있으나, 이 내용들을 담은 이슈들은 수록되지 않았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