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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1일 10시 0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2일 14시 12분 KST

'트럼보' 포기하지 않는 일의 피곤함

그린나래미디어

달튼 트럼보는 국내에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쳐갔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휴일>, <빠삐용>의 각본가로 알려져 있고, 좀 더 영화팬이라면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의 각본가로 스친 적이 있을 것이다. 음악팬이라면? 그가 만든 <쟈니 갓 히스 건>이라는 끔찍한 영화가 메탈리카의 'ONE'에 영감을 주고 또 뮤직비디오에도 영상이 쓰였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력만 보면 헐리우드의 금수저로 평생 평탄한 삶을 살면서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막 존경받고 그랬을 거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는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특히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유효하며, 철지난 말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또한 너무 많이 쓰이기 때문에 잘 적지 않는 말이다.(아아 촌스러운 현실이라는 아이러니!) 이 영화는 본래 위스콘신의 듣보잡 상원의원이었으나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면서 셀럽이 된 'J.R 매카시'가 실제로 살아서 펄펄 칼을 휘두르던 때, 직접적으로 타깃이 된 '헐리우드 텐'이라 불렸던 헐리우드 내의 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트럼보는 그들 사이에서 리더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은 헐리우드의 모든 제작사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영웅담이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천재 작가의 화끈한 버티기!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역시 평범한 사람으로서,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팔, 다리가 잘린 채 어떻게든 신념을 지키며 버텨나가는 것을 아주 지난하고 피곤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름으로 쓰여진 각본은 어느 제작사도 구입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탈자도 생긴다. 하지만 트럼보는 청문회에 나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대신에, 자존심이고 경력이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본인의 이름을 숨긴 채 팔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글을 써준다. 그들 스스로 '손 씻고 살기 위해 이 바닥에 들어온 거야. 성질 긁으면 머리통을 날려버리지'라며 달튼 트럼보의 고용에 대해 물으러 온 배우 연합 사람을 내쫓는 킹 브라더스는 속물의 끝판 왕이다. 트럼보는 그들을 위해 기계처럼, 18시간씩 7일을 일하며 박봉을 받는 생활을 지속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재능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는 그 안에서도 작품을 통해 가명이지만 아카데미 각본가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다.

제이 로치는 이 영화를 '헐리우드 텐'의 대장이었던 트럼보만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의 모습을 조명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다. 좋은 가장이었던 그는 딸의 생일에 1분도 나타나기 싫어하는 일 중독에 걸리고, 점점 대의에 매몰되어 사사로운 것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변해간다. 마치, 세상에서 사라지라는 국가의 처분(?)을 피하려다가 되려 본인의 방식으로 망가져가는 모습이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양심수 분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런 부분들이 내내 심각하게 이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간 코미디 영화로 재능과 실력을 인정 받아온 제이 로치 답게, 리듬을 살린 편집과 이야기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잘 펼쳐냈다. <트럼보>는 가볍다는 인상도 없지 않으며 클라이 막스에는 오글거리기도 한다. 아니, 많이 오글거리는 부분이 마지막인데 그렇게 탄압을 한 것도 미국인이고 이겨낸 것도 미국인임을 보여주지만 이겨낸 미국인이 짱짱맨!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그의 연기는 물론 뛰어났지만) 남우 주연상에 브라이언 크랜스튼을 호명하면서 트럼보가 영화 속에 말했던 '더 나아진 미국'이 지금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심사 꼬인 아저씨의 혼자 생각이다. 배우의 덕을 굉장히 많이 본 영화다. 브라이언 크랜스튼의 호연은 물론이고 루이스 C.K, 다이안 레인, 헬렌 미렌, 마이클 스털벅 등 명배우들의 근사한 연기가 영화의 이야기의 허술함을 많이 메꾼다. 뭐 이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불만은 없다.

트럼보의 끔찍했던 시기를 좀 더 리얼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그가 연출한 단 한편의 영화 <쟈니 갓 히스 건>(1971)을 보시길 권한다. 앞서 말했듯 메탈리카의 'ONE'에 영감을 주기도 한 이 이야기는, 전쟁에 다녀온 쟈니의 이야기다. 그는 전쟁에서 크나큰 부상을 입는데, 바로 팔,다리가 모두 절단된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쟈니가 병원 침대에 누워 생각하는 것이 전부다. 답답하고 숨막히며 대단한 뭐가 나오지 않아도 자체로 악몽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한 번쯤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보고 나면 왜 이 영화가 2016년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한국이 얼마나 끔찍하게 촌스러운 나라인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더 나쁠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는 누구든 트럼보처럼 한 방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누구도 그처럼 버틸 생각을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술계고 기업계고 어디고 놀랍도록 닫혀있는 패거리 문화의 끝판! 그런 면에서 영화 속 속물 제작자 킹 브라더스의 존재가 참 부럽다. 포기하지 않는 신념과 숨기지 않는 속물이 만나는 묘한 교차점에서, 이들은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한 채,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어떤 방해에도 '해야 할 일'을 하는 담담함. 어쩌면 세상의 복잡해 보이는 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단순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총선이 2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