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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9일 14시 24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11일 14시 12분 KST

30년 만에 다시 찾은 마을

강운구 작가는 70년대에 <마을 삼부작>을 촬영했고 삼십년이 지난 이천년대에 같은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같은 카메라와 렌즈로 다시 담기를 원했다. 강운구의 사진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이유로 후배 사진작가인 권태균 작가가 그 소임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강운구 작가는 또다시 30년이 지난 뒤에도 권태균 작가의 뒤를 이어 후배 사진작가가 그때는 여든 몇 살이 될 권태균 작가의 안내를 받아 세 마을을 촬영하기를 염원했다. 2015년 새해 벽두, 한국의 사진 계에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와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중견사진작가 권태균의 부고였다.

[잡식성 책장]<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강운구·권태균, 열화당, 2006

고향마을은 산골에 자리 잡고 있었고, 마을입구는 길게 이어졌다. 어린 시절 지평선만큼 길어 보였던 끝자락에는 하도 오래돼서 면사무소에서 별도로 관리하는 정자나무가 주민들에게 쉼터를 만들어주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은 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길이어서 학교를 마친 우리가 동네입구에 다다르면 자전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고역이 시작된다. 정자나무 아래 그늘에서 자리 잡고 있는 어른들의 눈초리는 아이들이 시야에 등장할 때부터 당신들을 지나칠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은 자전거를 끌고 한참을 경사진 길을 걸어야 했다. 정자나무 아래 어른들과 나란히 수평선을 긋게 되면서 정점을 찍고 몇 걸음을 더 걸어야 온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동네 아이들의 숙명이었다.

30년이 지난 가끔 우리 동네를 찾는다. 나도 더 이상 자전거를 끌고 가는 소년이 아니어서 자동차를 운전해서 순식간에 문제의 정자나무를 지나지만 이젠 더 이상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없다. 동네의 '아래뜸'을 지나 '웃뜸'에 자리 잡은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예 단 한 명의 마을 주민을 구경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유령마을을 지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동시에 30년 전에는 이 마을에 방앗간과 이발소 그리고 두 개의 구멍가게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전통마을이 새마을운동의 이름하에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사진가 강운구는 '엿집. 집적 만드러 팝니다. 엿을 팝니다'라는 조그마한 안내판을 내건 집이 있던 마을이 '이 땅에 없는 마을'이 되는 과정을 렌즈에 담았다. 강원도 원성군의 '황골', 강원도 인제군의 '용대리', 전라북도 장수군의 '수분리'를 간신히 '발견'해낸 사진가 강운구는 실용적이고 아름다웠던 마을이 새마을운동이라는 폭력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

비록 봉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희미했고, 호롱불은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위태로웠지만 아랫목은 따뜻했고 식구들은 옹기종기 정답게 모여살았다. 산업화의 미명하에 양철로 대변되는 어설픈 개발과 함께 전통마을은 파괴되었고 농촌사람들은 '농자 천하지대본'이라는 지배계층이 꼬이려고 유포한 허울을 내던지고 도시변두리로 몰려갔고 도시 빈민으로 편입되어버렸다.

강운구의 사진은 드라마틱하거나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하지 않고 다만 정을 도탑게 나누면서 살던 전통마을과 사람들을 담담히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다. 초가집 좁은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아버지 그리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면서 줄넘기를 하는 딸아이의 모습, 들에 일하러 나간 어른대신 동생을 업고 달래는 누나, 쟁기질에 지친 한우가 들판에 나뒹굴며 땡깡을 부리는 장면은 어디 하나 정답지 않은 구석이 없다.

<마을 삼부작>이라고 이름 지워진 이 아름다운 사진집이 2001년에 나왔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절판이 되었다. 마치 사라진 고향을 찾아 헤매듯이 헌책방을 방랑하다가 우연히 시립도서관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마치 수십 년 만에 만난 고향사람을 상봉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봉의 감격도 잠시 도서관의 장서는 나의 소유가 아니니 안타깝지만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와신상담하며 지내던 중 놀랍게도 2006년에 2쇄가 출간되었는데 더욱 감격케 한 것은 <마을 삼부작>뿐만 아니라 강운구 선생의 후배인 권태균 작가의 <강운구 마을 삼부작 30년 후>가 세트로 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가 없었던 개천에 지금은 이차선 시멘트 다리가 놓였다.

소초면 흥양2리 85번지(길 우측 산자락). 사진 속 아주머니(신동희, 현재 78세)는 지금도 삼십 년 전에 살던 집 건너편의 산자락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1974년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지게를 진 남자가 신동희 씨의 아들 김장수 씨(현재 63세)다. 업고 있던 손자는 이제 삼십대 중반의 어른으로 성장했다.

너와집이 '산간 불량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주민들이 떠난 뒤에 그이들이 가꾸던 밭에도 숲이 우거졌다. 1973년 사진 오른쪽의 전나무가 2003년 사진의 오른쪽 나무 사이로 보인다. 가운데 난 길은 그제나 이제나 백담사(白潭寺) 쪽에서 영시암(永矢庵) 터를 거쳐서 마등령(馬等嶺)이나 봉정암(鳳頂庵)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길이다.

강운구 작가는 70년대에 <마을 삼부작>을 촬영했고 삼십년이 지난 이천년대에 같은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같은 카메라와 렌즈로 다시 담기를 원했다. 좀 더 객관적이고 엄격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강운구가 아닌 다른 사진가가 촬영하기를 원했고 강운구의 사진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이유로 후배 사진작가인 권태균 작가가 그 소임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권태균 작가도 이 작업을 흥미롭게 생각했는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했다.

30년 전에 촬영한 마을이 아예 없어지거나 헝클어져셔 강운구 자신조차도 어디가 어딘지 가늠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변한 것은 지형지물만은 아니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소용돌이치는 바다가 되어 버린 탓에 30년 전 삼백여든아홉 명이 살던 수분리는 2006년에는 백예순 두 명만 사는 마을이 되었다.

각고의 노력과 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겨우 30년 전의 촬영 지점을 찾아가긴 했지만 이미 옛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강운구 마을 삼부작 30년 후>는 이런 이유로 1970년대에 강운구 작가가 담았던 122컷중에서 33컷만이 같은 장소에서 재촬영되었고 권태균 자신이 새로이 촬영한 29컷과 더해져 세상에 나왔다. 강운구 작가는 또다시 30년이 지난 뒤에도 권태균 작가의 뒤를 이어 후배 사진작가가 그때는 여든 몇 살이 될 권태균 작가의 안내를 받아 세 마을을 촬영하기를 염원했다.

귀때기골에서 약초를 캐던 사람들이 산신께 제의를 올리던 큰 바위도 어느 해 계곡의 물이 범람하면서 이렇게 기울었다.

2003년 사진의 건새집들은 모두 기와집이나 벽돌집으로 '개량'되었으나 위치는 서른 해 전 그대로이다.

삼십 년 전 장에 내다 팔기 위해 계란 꾸러미를 만들던 권문옥 씨가 예전의 그 마루에 앉아 있다. 안방 창호지문이 유리문으로 바뀌고, 마루에는 비닐 장판이 깔렸다. 옛 사진 속 아이는 남원으로 시집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눈 오는 날 세 살 난 큰딸(양미화, 현재 37세)을 업고 빙그레 미소짓던 허봉니 씨(현재 61세)가 예전의 그 자리에 섰다. 허봉니 씨는 수분리에서는 유일하게 삼십몇 년 전 눈 오던 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두리번거리며 다니다가 자기 사진을 찍었던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2015년 새해 벽두, 한국의 사진계에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와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중견사진작가 권태균의 부고였다. 여든 몇 살까지 살아서 세 번째 '마을 삼부작' 촬영을 안내할 사진작가는 그렇게 우리 곁은 떠났다. 그가 담아온 피사체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사진가 강운구와 그의 후배 권태균이 담아왔던 눈부시도록 정겨운 시절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추구해온 한국적인 질감이 스며있는 사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강운구 우연 또는 필연><저녁에>등의 사진집으로 대표되는 사진가 강운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며 ,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권태균 작가의 빛나는 사진은 여러 경로에 걸쳐 우리 곁에 남아 숨쉰다.

그러나 이 두 사진가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역작은 역시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라고 본다.

* 사진과 사진설명은 열화당 제공.

[정정] 본문 아래서 두 번째 사진설명 중 <황순권씨>는 <권문옥씨>로 12일 정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