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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9일 06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29일 14시 12분 KST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보급형 유동근'

보급형 유동근의 이름 석 자를 소개받는 순간 살짝 놀랐다. 그는 다름 아닌 나의 절친 '나쁜 남자'와 '국민교육헌장'을 차례로 섭렵한 '과수원집딸내미'가 대학에 와서 '진하게'사귀고 있다는 선배였다.

Shutterstock / Steve Mann

* 이 글은 <과수원집 딸내미를 '국민교육헌장'과 찾아간 밤>과 <나쁜 남자가 과수원집 딸내미를 떠난 사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취업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비할 바는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인 당시에도 '사상최악의 취업난'이란 헤드라인이 심심찮게 신문의 1면을 장식했으니 대졸자가 취업하기란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경각심을 가지고 야심차게 새벽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터를 잡기 시작했지만 타고난 게으름니스트답게 취직공부에도 9 to 5 시스템을 도입해서 철저히 준수했다. 즉 9시부터 강의가 빈 시간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되 오후 5시에는 어김없이 귀가하는 일정인데 나의 목표는 방송사를 비롯한 언론사와 한국통신 4급간부 채용 시험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는 모름지기 한방에 가야'하지 밑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는 '뽀대' 나지 않은 삶은 삼가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리고 '어두워지고 음의 기운이 완연할 때'는 '잠을 자야'한다는 은사님의 교훈을 철저히 준수하여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을 학교에서 먹는 일은 전혀 없었다. 즉 오후 수업이 마치고 교내 방송국이 일과를 마치는 시그널 뮤직과 함께 나는 공부를 파하고 거처로 발길을 향했다. 물론 귀가 후에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의 금과옥조인 9 to 5 시스템에는 '체력단련과 지면 정보를 통한 세상 공부'라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점심을 먹고 나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도서관 로비에 있는 스포츠 신문을 완독하고 종이컵을 구겨 만든 우리들만의 공인구로 제기차기나 야구를 하는 일정이다.

어느 가을날, 그날도 9 to 5 시스템의 일정에 따라서 느긋하게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도서관 로비에서 서성대는데 저 멀리서 황야의 무법자처럼 오토바이 한 대가 질주해오는 것이 보였다. 워낙에 큰 학교라 오토바이를 타고 교정을 누비는 학생들이 많아서 오토바이 자체가 특별히 주목받을 상황은 아니나 문제는 그 오토바이에 덩치가 산만한 시커먼 남자 세 명이 지들이 무슨 전 세계를 정복하는 몽골의 전사나 되는 것인 냥 요란하게 도서관 쪽으로 돌진해와서 그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징기스칸의 후예들의 면상의 윤곽을 파악하는 순간 호기심은 창피함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운전하는 양반은 얼핏 보면 탤런트 유동근을 연상케 하는 잘생긴 학생이었고, 뒤에 탄 두 명의 졸개는 다름 아닌 고향의 동기동창 친구 놈들이었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으니 일단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인사를 했는데 그 '보급형 유동근'이가 고향선배라고 한다. 그들은 교정의 모처에 있는 단감을 따먹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뒤에 탄 두 놈은 자신들의 학교도 아니면서 넓은 캠퍼스에 있는 과실수의 종류와 수량 및 숙성도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손수 가꾼 과수원으로 수확을 하러 가는 품새였다. 그런데 보급형 유동근의 이름 석 자를 소개받는 순간 살짝 놀랐다. 그는 다름 아닌 나의 절친 '나쁜 남자'와 '국민교육헌장'을 차례로 섭렵한 '과수원집딸내미'가 대학에 와서 '진하게'사귀고 있다는 선배였다.

'보급형 유동근'은 면소재지 출신이고 부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며 1남 3녀의 독자이라서 일찌감치 도회지에 보내지는 엘리트코스를 밟았다가 나와 같은 대학에 다녔는데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던 4살 아래의 내 친구들의 대장노릇을 했다. 면소재지에 살았던 내 동기들에게는 그는 우상이었고 성인들의 문화를 전수해준 '선교사'이기도 했다. 당구, 카드, 테니스, 야생동물 사냥, 기타연주 등의 예체능을 포함한 온갖 잡생활을 내 친구들에게 보급했고 지휘감독을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동기의 퀸카인 과수원집 딸내미의 새로운 남친 이기도 한 '보급형 유동근'은 지금 옛 부하들을 이끌고 '대학캠퍼스에서의 채집생활을 통한 생존 기술'을 교육시키고 있는 중이다. '보급형 유동근'을 차근히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과수원집 딸내미를 떠올렸는데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대학 국문과에 다녔다. 나의 불쌍한 친구 '국민교육헌장'이 변심한 '과수원집 딸내미'집에 술을 먹고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동기들의 평가는 대체로 과수원집 땔내미가 잘못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결론이었다. 그 사건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국민교육헌장'이 과수원집 딸내미의 부친과 연락을 받고 출동한 숙직선생님께 얻어맞을 때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대목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당한 일인 양 격분했다.

아무리 국민교육헌장이 술을 먹고 불쑥 찾아왔기로서니 도의적인 원인제공을 한 과수원집 딸내미가 나서서 자신의 부친의 화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국민교육헌장이 한대라도 덜 맞도록 조치를 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만큼 억울한 경우도 드물다. 난 당사자도 아닌데 단지 친구를 염려해서 국민교육헌장의 뒤를 밟은 죄밖에 없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과수원집 주인이 콩나물시루 받침대로 쓰이는 Y자형 막대로 목이 조여지고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고난을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왠지 나는 과수원집 딸내미에게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과수원집 딸내미는 정이 많고 다정다감해서 싫어하기가 힘든 친구였다. 국민교육헌장이 자신의 부친에게 얻어맞고, 선량한 친구인 내가 콩나물시루 받침대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코빼기도 내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먼 훗날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본인도 국민교육헌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과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마음을 추스른 찰라에 국민교육헌장이 또 술을 먹고 자신의 집에 불쑥 방문했다는 이야기다. 그랬다. 국민교육헌장 놈이 천하에 나쁜 놈이었다. 과수원집 딸내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처남댁이 될뻔한 과수원집 딸내미의 현남자 친구이자, 십년뒤에는 나의 처남이 될 '보급형 유동근'은 나와 인사를 나누는둥 마는둥하고 자기 것도 아닌 단감을 따먹겠다고 내 시야에서 금방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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