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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5일 10시 0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25일 14시 12분 KST

나쁜 남자가 과수원집 딸내미를 떠난 사연

나쁜 남자와 과수원집 딸내미의 커플은 그 당시 면소재지 시골학교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나쁜 남자는 원래 그때의 시골아이답지 않게 사근사근하고 말수가 많았으며 더구나 외국에서 철마다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멋진 옷을 보내주는 친지를 둔 덕분에 패션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더구나 외모도 수려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나름 잘생긴 얼굴이고 공부마저도 평균이상이었다. 과수원집 딸내미는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보아온 전형적인 '시골의 공부 잘하고 예쁜 여학생'이었다.

시네마서비스

* 이 글은 <과수원집 딸내미를 '국민교육헌장'과 찾아간 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과수원집 딸내미에게 냉혹한 이별통보를 한 내 친구 나쁜 남자는 원래 그런 놈이 아니었다. 모일 모시까지 교문 앞에 나와서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결하겠다는 과수원집 딸내미의 비장한 최후통첩을 간단히 무시한 것은 사실 그에게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데 이 사실만으로 그를 비정한 놈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쁜 남자와 과수원집 딸내미의 커플은 그 당시 면소재지 시골학교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나쁜 남자는 원래 그때의 시골아이답지 않게 사근사근하고 말수가 많았으며 더구나 외국에서 철마다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멋진 옷을 보내주는 친지를 둔 덕분에 패션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더구나 외모도 수려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나름 잘생긴 얼굴이고 공부마저도 평균이상이었다. 과수원집 딸내미는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보아온 전형적인 '시골의 공부 잘하고 예쁜 여학생'이었다.

시골학교의 완벽한 커플이 최고의 사랑을 나누다가 갑자기 한쪽의 일방적인 파기선언이 있기까지의 사정은 이랬다. 80년대 후반인 당시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생활의 가장 큰 행사였던 무려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나쁜 남자 녀석이 버티는 것에서 이 모든 사단은 시작되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수학여행에 불참하겠다고 의사표현을 하는 것 자체가 '대역죄인'으로 치부되던 그 시절이었다.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는 최근에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나는 친구의 입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는데 이 놈 말로는 '수학여행에 안 갈 건데요'라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교사가 된 나만 보면 그때의 악몽을 되뇌일 정도의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이 녀석은 사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유라도 있었는데 나쁜 남자는 수학여행을 못 갈 하등의 이유가 없으면서도 수학여행을 거부하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생각할 여지를 위한 '말미'까지 당당히 허락받았다.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특혜에 버금가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 엄청난 호의는 나쁜 남자가 평소에 얼마나 선생님과의 유대관계가 끈끈하며 친근한 관계였는지를 반증한다.

나쁜 남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한 친구로서 그 녀석의 속마음을 유추해보면 그는 수학여행을 가기 싫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의 집중 조명을 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녀석의 시나리오는 이랬을 터였다. 자신이 수학여행을 불참하기로 하자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애통해하며 제발 수학여행에 같이 가자고 애원 복걸하지만 자신은 쿨하게 거절한다. 그러다가 수학여행 출발 직전에 극적으로 수학여행에 동참하기로 한다는 발표를 해서 모두의 열광 속에 당당히 수학여행 전세 버스에 탑승한다는 예상 말이다.

그의 예상 시나리오는 반은 맞았고 반은 어긋났다. 여러 선생님들이 그의 불참을 안타까워했지만 수학여행참가선언의 타이밍이 약간 빗나가는 바람에 합류시켜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선생님과의 밀당에 있어서 치명적인 계산착오 탓에 의도치 않게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나쁜 남자는 졸지에 수학여행을 제발 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처지가 되었고 당황한 담임교사는 원래 반장이나 부반장의 특권이었던 '화랑교육원 입소'라는 사탕으로 간신히 그를 달래고 수학여행길에 올랐다.

원래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최후로 살아온 병사처럼 환영을 받으며 수학여행길에 오르기를 기대했다가 졸지에 약간의 계산착오로 을씨년스럽게 낙오자가 되어버린 나쁜 남자는 엉뚱한 만남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 녀석 말고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된 학생이 또 한 명 있었으니 그는 무남독녀로 자라 부모로부터 '공주'처럼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란 여학생이었다.

'공주'는 신장병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경우였고 나쁜 남자는 좀 더 화려하게 수학여행을 가려다가 엉뚱하게 낙오된 처지였는데 수학여행을 가지 못 하게 된 이유는 극명하게 달랐지만 수학여행의 낙오자라는 공통점은 그들을 녹아내리는 찰떡처럼 뭉치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가장 큰 축제에 참여하지 못한 처지라는 공통분모는 그들을 관할구역이 아닌 제법 먼 타지인 금오산을 함께 오르는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고, 함께 산을 오르는 경험은 이미 과수원집 딸내미라는 멋진 여자 친구를 둔 나쁜 남자에게 '공주'를 향한 특별한 감정을 생기게 만들었으며 '공주' 또한 임자가 있으며 그 임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절친 임에도 불구하고 나쁜 남자와 금오산 자락에서 '뽀뽀'를 감행하는 대담성을 선물해주었다.

과수원집 딸내미가 할리우드 스타처럼 화려한 여자라면, '공주'는 조선시대 정경부인과 같은 기품이 우러나왔지만 무던하였고 동갑이지만 큰누나처럼 느끼게 해주는 아우라가 넘치는 여자였다. 즉 나쁜 남자의 입장에서는 '신세계'였던 셈이고 2년 동안 온갖 과일과 애교로 자신을 보필했던 여자 친구를 버리는 결단을 쉽게 내렸다. 나쁜 남자의 수학여행의 불참은 또 다른 한 남자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나의 짝꿍이었는데 '돌부처'처럼 다부진 체력에 명석한 두뇌마저 겸비하여 고등학교 3년 내내 '서기'를 역임한 인재였다.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그는 불행하게도 '공주'를 사모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마저도 수학여행근처였다.

그는 수학여행을 하면서 주요 관광지에서 어김없이 엽서를 구매했고 남들이 광란의 밤을 보낼 때 구석에서 침을 묻혀가면서 그 잘 쓰는 글씨로 엽서를 빼곡히 채워 '공주'에게 보냈다. 물론 공주는 그 시각 나쁜 남자와 금오산을 비롯한 고향 근처의 주요 관광명소를 투어하고 있었다.

경주마처럼 수업시간에 정면에 자리 잡은 칠판 말고는 곁눈질이라고는 몰랐던 '돌부처'는 이미 '공주'가 나쁜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도 그녀를 향한 연정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아니다. 짝꿍인 내가 보기엔 그는 그녀를 향한 사랑을 혼자서 무럭무럭 키워나갔고 급기야는 환각상태에 빠져들었다. 제3자인 내가 보기엔 교실 뒤쪽에 자리 잡은 '공주'는 별생각 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불쌍한 내 짝꿍 '돌부처'는 '공주가 자신이 공부에 좀 더 열중하게끔 말없이 눈치를 준다'라고 생각했고 내게 그 사실을 자랑했다. 살다 살다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은 처음 보았다.

나쁜남자 또한 나의 절친 이었는데 '과수원집 딸내미'와 '공주'사이를 거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느니 당연히 대학시험에 떨어졌고, 원래는 장원급제를 해야 마땅할 돌부처는 하루에 18시간 정도는 책상에 앉아있었으나 머릿속은 온통 '공주' 생각으로 가득한 탓에 역시 재수의 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배신으로 얼룩진 나쁜 남자와 공주의 사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쁜 남자와는 달리 착실히 자신의 앞길을 챙긴 공주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남녀공학 학교는 못 보낸다'라는 생각을 하는 완고한 경상도 어른들이 선택하는 여대의 법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패션을 선도하는 쾌남아의 신분에서 졸지에 꽤재재한 재수생으로 신분이 급하락한 나쁜 남자는 법대생이 된 공주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에 격분한 나쁜 남자는 한걸음에 몇백리 떨어진 그녀의 자취방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변해버린 여심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확실히 나쁜 남자 이 녀석은 친구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놈이었다. 삼류연애소설도 그다지 읽지 않은 이 친구는 '그래도 한때는 나를 사랑했었다라는 말만 해주면 깨끗이 헤어져 주겠다'라는 주옥 같은 멘트를 그녀에게 최후통첩으로 날리는 '난 놈'의 전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성일이가 등장하는 영화 속의 대사'와 같았던 말은 '공주'의 콧방귀라는 피드백만을 얻었고 자신의 천재적이고 극도로 낭만적인 대사가 간단히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봉변을 당한 나쁜 남자의 눈에 자신이 그동안 선물했던 인형이 일렬횡대로 가지런히 화장대위에 서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 인형을 나쁜 남자는 볼링 핀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깨끗한 '스트라이크'를 치고 그녀의 자취방에서 물러나왔으며 그 사건으로 다시는 공주와 대화를 할 기회는 없었다.

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 후 고향집에서 과외를 하게 되었고 아무 우여곡절도, 한 일도, 한 연애도 없이 대학을 졸업한 나는 공주네 집에서 엎어지면 배꼽이 닿을 곳에 위치한 고향의 모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공주네 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어느 날 공주네 모친으로부터 '자네 말고도 시집 갈 곳은 많지만, 혹시 자네 공주한테 장가 오지 않겠나'라는 제의를 받기에 이른다. 물론 나의 아내는 무남독녀가 아닌 1남3녀 중의 둘째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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