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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1일 13시 11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31일 14시 12분 KST

사진으로 만나는 어머니의 엄마 | 김운기 작가의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

어머니는 거친 숨소리와 이따금씩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셨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다.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한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몸을 뒤척이셨다. 그 순간 어머니의 생기 없는 입술에서 '엄마!'라는 또렷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의 김운기 작가는 1937년생으로 어머니와 동갑이다. 나는 당신의 딸에게서도 듣지 못한 외할머니의 추억을 그의 사진으로 본다.

2002 한·일 월드컵이 막 시작되었을 때 중풍으로 쓰러진 나의 어머니는 한동안 중환자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셨다. 담당의사가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나는 재판관이 내리는 선고처럼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만난 어머니의 민둥 머리가 낯설고, 다음날로 예정된 수술이 무서워서 밤늦도록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거친 숨소리와 이따금씩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셨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다.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한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몸을 뒤척이셨다. 그 순간 어머니의 생기 없는 입술에서 '엄마!'라는 또렷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니께서 코흘리게 시절 울면서 엄마를 찾던 목소리가 저렇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절했고 애처로웠다.

어머니는 '엄마'가 그리우셨던 게다. 그제야 나는 '어머니'가 한때는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해도 아까운 할머니의 '딸아이'였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외할머니를 겪어보지 못한 불행한 외손자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게도 외할머니가 있었구나는 생각을 그때 처음했다. 어머니는 원래 양보하고, 고생하고, 자식을 위해서 희생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인 것으로만 생각해왔던 나 자신이 뻔뻔스러워 보였다. 나의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에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 품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게다.

어머니의 '엄마'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분은 어머니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중풍으로 12년째 고생하시고 거동도 혼자서는 못하는 어머니의 생존이 이토록 소중하고 고맙다. 어머니가 '엄마'를 찾던 날로부터 12년이나 지나고서야 나는 불쑥 생각났다는 기색으로 가장하면서 어머니께 당신의 '엄마'는 어떤 분이었느냐고 여쭈었다. 아무런 기록도 없는 외할머니에 대한 묘사는 단 한 마디가 전부였다. '부지런하고 날쌘 분이셨고, 집에서 오랫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다'

묘하게도 사진집 전문 출판사인 '눈빛'에서 나온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의 김운기 작가는 1937년생으로 어머니와 동갑이다. 나는 당신의 딸에게서도 듣지 못한 외할머니의 추억을 그의 사진으로 본다.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이 이 땅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와 그 자식들에게, 이토록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에 담겨있는 사진들은 지나치게 인물 자체를 부각시켜 예술적인 감성만을 자극하지도, 그렇다고 사진의 기록적인 기능을 강조해서 인간적인 소회를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김운기 작가의 사진은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차근차근 들려주기도 하지만 어머니 주변의 일상사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추억과 기록을 모두 갖춘 보기드문 사진이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이다.

한국 전쟁 때 전사한 아들의 묘를 찾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전쟁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 않는 가족은 드물다. 나만 해도 그렇다. 한국전쟁이란 그저 한국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역사지식의 일부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내게 큰아버지가 계셨고 전쟁 때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 번도 불러보지도 보지도 못한 큰어머니께서는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여의었고 친정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그리고 자식을 전쟁 통에 먼저 보낸 할머니께서는 명함크기만한 누런 종이의 전사통지서를 받아들고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세상을 버리셨다.

한가로이 어머니께서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늘 고단했던 농사일을 마치고 한밤중에야 뒤꿈치가 해어진 자식들의 양말이며, 옷가지를 바느질하셨고 그나마 자식들도 도저히 못 입을 정도로 낡아버린 러닝셔츠는 어머니가 대신 입으셨다.

들에 다녀온 어머니의 고무신은 언제나 세워져 있었다. 진자리를 가려서 피해 다닐 호강을 못 누리는 어머니의 고무신은 언제나 물이 차고, 흙먼지가 가득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랑에서 깨끗이 씻겨서 세워서 말리셨다. 그런데 따가운 햇볕에도 미쳐 덜 마른 고무신은 다시 들로 향하기 일쑤였다.

아! 생각해보니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고무장갑을 낀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냥 맨손으로 차갑디 차가운 물과 마주쳐야 하셨다. 그런데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늘린 빨래조차도 꽁꽁 얼어서 마치 마네킹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애볼래? 농사일할래? 라고 물으면 후자를 택한다고들 하지만 시골에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애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보면서 새참을 마련해야 했고, 집안에서 할 만한 농사일을 함께 해야 했다.

시골의 노인들은 그냥 놀지 않는다. 시골의 노인들은 세상을 버리는 순간까지 일꾼이다.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하다가도 젊은이가 만나는 고약한 고민의 해결은 모두 노인들의 몫이었다. 지나가던 손자를 붙잡아 먹거리를 챙기는 것도 노인이었고, 법으로도, 그 잘난 공부머리로 해결하지 못하는 온갖 골치 아픈 일도 노인들의 몇 마디면 간단히 해결되었다.

설 명절 대목 장을 가는 세 여인이다. 빈몸으로 따라가는 새댁은 버릇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시집을 온 첫 해에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아름다운 전통에 충실한 시어머니를 둔 것 뿐이다. 사진 속의 며느리와 아마도 같은 세대였던 어머니께서도 갓 시집온 며느리가 일을 거들려고 하자 냉큼 거절하셨다. 대신 며느리가 끔찍이도 좋아한다는 옥수수를 평소보다 더 많이 촘촘히 심으셨다.

어머니는 늘 농사일에 매달리셔야 했고 한가로이 자식들과 놀아줄 여유가 없었다. 당신들이 어디 무심해서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았겠는가?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함께 자랐고 동네 아이들은 모두 형제나 다름없었다.

소를 데리고 풀을 뜯기는 일은 자식들에게 주는 놀이였지 일손을 들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5년 후의 운동회의 모습이다. 모든 이가 궁핍했던 시절이지만 아이들의 운동회만 해도 아이들만의 잔치가 아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함께 음식을 장만했고, 함께 나눠먹었다. 그리고 내 자식 네 자식 가리지 않고 목청을 높여 응원했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내 자식처럼 안타까워했다. 나만 해도 그랬다. 소심한 어머니보다도 앞집 아주머니가 더 크게 날 응원했던 일이 눈에 선하다.

김운기의 사진집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은 우연히 얻어걸린 진귀한 장면을 실은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도, 옛 어른들의 고달픈 생활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도 않다. 아름답다고만 하기엔 궁핍한 삶이었으며, 고달프다고만 하기엔 어른들의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김운기 작가는 그저 담담히 우리네 어머니의 엄마의 세월을 소상히 들려줄 뿐이다.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의 모든 사진에 곁들여진 에세이만 해도 그렇다. 어려운 사진 이론이나 알듯 모를듯한 현학적인 말놀음도 없다. 오롯이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구수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겪지 못했지만,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네 어른들의 이야기가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