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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05일 07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05일 14시 12분 KST

윌리엄 더글라스 |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난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로서 그의 사상과 철학만은 변함없이 내 의식을 지배해 왔다. 어느 사회에서나 90퍼센트의 법률가는 상위 10퍼센트 국민의 이익에 기식하여 삶을 영위한다. 나머지 10퍼센트만이라도 더글라스처럼 90퍼센트의 지친 영혼에게 연민의 눈길을 주는 나라, 그런 나라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서문과 후기입니다.


<서문>

멋모르고 들여놓은 법학이 평생 업이 되었다. 정년퇴임을 기다렸다. 법학교수 전(廛)을 거두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은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수시로 다짐했었다. 새삼스레 해묵은 자료를 뒤진다. 빛바랜 복사물을 챙긴다. 1987년 초, 귀국 뱃짐에 켜켜이 쌓여 실려 온 내 청년시절의 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교수 자리를 얻기 전에 논문 형식으로 그의 저술과 판결문을 분석했다. 이제 다소 풀어진 글로 그의 삶과 시대를 되돌아본다. 이 책은 미국법을 공부한 나의 궤적의 일부이기도 하다. 왜 내가 법학교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떤 법학자로 살고 싶었는지, 약간의 단서가 담겨있다. 내게 더글라스는 멋모른 채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나라였던 미국의 법을 공부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인전을 싫어했다.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 군자와 소인, 위대한 사람과 비열한 인간,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 두 부류의 인간만 있다고 가르치는 듯했다. 읽는 이의 열등감을 강요하는 주인공의 행적에 압도되었다. 위인은 모두 진실하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도식이 불편했다. 내가 읽은 법률가는 시종일관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뿐이었다. 옳은 일을 하는 인간은 조그마한 도덕적 흠도 없어야만 했다. 살고 보니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다.

유려한 필치의 창의적인 판결문으로 초년 법학도의 혼을 앗았던 나의 사법영웅은 알아갈수록 흠투성이 인간이었다. 세상을 이끌고 깨우치는 출중한 법관은 응당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유아적 환상을 벗어나면서 오히려 그의 인간적 결함에 애착이 갔다. 나잇살 먹고 보니 내가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일 뿐 행태는 비슷했다. 더글라스의 행장에서 때때로 나 자신의 삶의 궤적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난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로서 그의 사상과 철학만은 변함없이 내 의식을 지배해 왔다. 어느 사회에서나 90퍼센트의 법률가는 상위 10퍼센트 국민의 이익에 기식하여 삶을 영위한다. 나머지 10퍼센트만이라도 더글라스처럼 90퍼센트의 지친 영혼에게 연민의 눈길을 주는 나라, 그런 나라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 행여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소수의 독자에게나마 그런 취지로 읽히기 바란다.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우선 나와 내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역사학자 약전 (藥田) 김성식 (金成植, 1908- 1986)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암울하던 군사독재 시절 '마지막 선비'로 칭송받던 약전선생님이야말로 언행일치의 표상이셨다. 1980년,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나서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시면서 선생님은 딱 한 마디 하셨다. "돌아오는 거지!" 1986년 1월, 유학과정을 마무리한 나는 일시 귀국하여 선생님께 진로를 상의 드렸다. 한 주 후에 다시 뵙기로 했다. "네 아버지 묘소에 가거든 너를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내 말을 전해라." 사흘 후, 경남 밀양의 산촌 고옥에서 나는 선생님의 돌연한 부음을 접했다. 황망했다. 그때 심경을 이렇게 썼다. "...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가심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라. 지난 10여 년 간 캄캄한 내 세계를 밝혀주던 큰 별은 사라졌고, 그 찬란한 빛을 내 어디서 다시 찾으리오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찾으리라. 끝내 찾지 못하면 내 작은 반딧불이라도 스스로 밝히리라. 언젠가는 별빛도 반딧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그날이, 밝은 태양이 내 조국 산하를 영원히 비출 그날이 오리라 굳게 믿으면서."1) 여섯 달 후, 나는 더글라스의 판결문을 분석한 논문집을 첫 저서로 내어 선생님의 영전에 바쳤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주셨다. 선생님의 생전에 바치고 싶었던 소망은 불과 몇 개월의 시차로 무너졌지만 천국에서라도 이 책을 보시면 대견해 하시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약자의 고난과 슬픔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하신 선생님이기에 약자의 대변인, 인류의 후견인 다글라스 판사가 흘린 연민의 눈물에 합루(合淚)하시리라."2)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모란공원에 모셨던 선생님의 묘소마저 내 기억과 추적권을 벗어났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감화는 한 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 금랑 (琴郞) 김철수 (金哲洙) 선생님이 베푸신 학은은 학자로서의 내 삶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자애로우신 선생님의 배려를 학문적 성취로 보답하지 못한 내 성정과 역량이 아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당시 우리 학계를 지배하던 강력한 독일 '국가학'의 전통 아래서도 국가권력보다는 기본권에 비중을 두시던 선생님의 민주헌법 철학만은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예비학자로서는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나를 모교의 교수로 채용해 주신 석암(碩岩) 배재식 교수님(1929-1996)의 열린 자세에 때늦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초임교수의 객기로 적지 않은 불편함을 안겨드렸지만 언제나 혼화한 미소로 품어주신 배학장님의 은혜는 내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대학원 시절 이래 이수성교수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총애는 내 평생의 축복이다. 함께 재직했던 많은 선후배 동료들의 인도와 사랑에 감사드린다. 더글라스처럼 나이가 들어도 늙은이가 되지 않도록 청청한 정기를 공급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산타클라라는 나의 미국법의 고향이다. 조지 알렉산더 학장님(George J. Alexander(1930-2013)과 러셀 갤로웨이 교수님 (Russell W. Galloway(1940-1993), 두 스승은 만학의 이방인 학생에게 미국헌법과 인권의 안목을 넓혀 주셨다. 선생이자 영원한 친구인 필립 히메네스 (Philip Jimenez)교수의 우의는 내 가족 모두의 자산이다.3) 동급생 중에서 데니스 정(Dennis Jung), 에밀리오 후에르타( Emilio Huerta), 미구엘 데마판 (Miguel Demapan) 유티오 덴고클 ( Yukiwo Dengokl), 네 사람과 나눈 진한 우정은 오랜 추억거리다. (이들은 모두 더글라스 철학의 찬미자들이었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더글라스 자료의 열람에는 B.A. Kufner, Pablito Garcia Fuentes, 두 분의 노고가 컸다. 더글라스의 향리, 야키마와 왈라왈라 방문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야키마밸리박물관 역사연구회(Yakima Valley Museum History Society)의 다이에너 리 (Dinah Lee) 스탠리 와거너 (Stanley Wagner Jr.) 변호사, 두 분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04년, 당시 생면부지의 필자에게 자신의 저술을 헌정했던 시카고 대학의 톰 긴즈버그 (Tom Ginsburg)교수에게 때늦은 답례를 드린다.4)

많은 분들이 초고를 읽는 부담을 자원하였다. 그중에서 정종휴, 육성철, 김애경, 세 분은 필자가 그린 더글라스에 대한 인물평도 함께 돌려주었다. 편집과 교정의 가심질은 김종철 교수가 주도하는 영미헌법연구회 회원들의 몫이 되었다. 두 차례 독회를 거치면서 한결 가다듬어졌다. 김재원, 주한길, 정인희, 김상준, 장원일, 한상훈, 김영진, 이우영, 박종현, 최정인, 백재형, 최유경,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독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일 도움을 준 이동민과 강건우를 뺄 수 없다. 출판 시황이 극도로 나쁜 시기에 또다시「라이프 맵」최형임 편집장의 신세를 졌다. 고맙다는 말로는 크게 부족한 빚이다. 표지의 더글라스 초상은 이영비화가의 작품이다.

이 책을 오랜 친우 박용일에게 드린다. 용일은 내가 알게 된 무수한 법률가들 중에 더글라스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불우한 초년을 살아 넘긴 의지의 삶도 그러하려니와 작은 불의도 참지 못하는 원칙론자의 성마름, 산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사랑, 가히 주위를 위축시키는 강건한 신체, 때때로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과도한 낭만성... 이 모든 점에서 용일은 내게는 더글라스의 현신이었다. 게다가 더글라스와는 달리 가족의 무한 신뢰라는 축복을 누리고 사는 그를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 헌법재판관이 되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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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1966년 봄, 당시의 이름 그럴듯한 고등학교의 특징 없는 문과생이 내딛는 전형적인 행보대로 나는 법대에 진학했다. 소년시절부터 어슴푸레 엿보인 다른 기질과 성향에도 불구하고 윗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주변의 강요와 설득도 있었다. '건전한 지성인', '정의로운 인간,' 스스로 정한 인생목표가 허망하게 느껴졌던 대학생활이었다. 서둘러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베트남에 가고 싶었다. 살아남으면 전장의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쓸 수 있을 듯도 싶었다. 그러나 2년도 채 못 되어 장엄한 파송선 대신 초라한 후송열차에 실려 결핵병원에 감금되었다. '5년간 정양을 요함.' 제대증과 함께 건네진 진단서, 쭈그러진 폐낭을 안은 신장 174센티, 체중 49킬로그램의 육신과 폐허를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꿈과 목표, 모든 것을 유보하는 심경으로 대학원에 들었다. 전 국토가 동토(凍土)였던 '겨울 유신공화국' 시절이었다. 대통령은 느닷없이 국회를 해산했다. '국민주권'을 선언한 헌법은 한갓 장식물이고 국민의 기본권이란 국가가 굴종하는 시민에게 베푸는 시혜에 불과했다. 공무원은 신분에 의해 헌법상 권리와 자유가 제한되는 '특별권력관계'에 복속된다고 했다. 행정부의 행위에 고도의 '자유재량'의 특권을 부여했다. 19세기 프로이센 국가학 (Staatslehre)의 유산이 대한민국 유신체제를 옹립하거나 관용하는 관변이론의 핵심기재였다. 실로 의분이 끓어오르는 일이었다. '국민의 저항권'을 졸업논문의 주제로 택하는 객기가 발동했다. 널리 존경받던 지도교수님의 우려가 오히려 은근한 격려로 비쳤다. 그러나 뜻밖의 위기가 닥쳤다.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다.5) 너무나 쉽게 대학원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것으로 학교는 끝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짓말 같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이 바뀌는 듯했고 아직 버리지 못한 숨은 열망이 되살아났다. 민주주의, 헌법, 국가와 국민, 소수자와 인권... 아무런 대책 없이 대기업 중견간부 생활을 접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서른세 살 만학도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어휘들이었다. 이 산만한 관념들을 궤는 중심축이 윌리엄 더글라스 판사였다. 대학원 시절에 그리스월드 판결을 읽고 받은 감동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생생했다.

1982년 1월 중순, 연방대법원을 방문했다. 재학하고 있던 펜실베이니아대학 LL.M. 과정의 연례행사였다. 외국의 청년 법률가들에게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용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워렌 버거 대법원장과 30분간의 면담도 마련되어 있다. 엄청난 특전이 아닐 수 없다. 인솔교수가 사전에 질문하고 싶은 지원자를 구하기에 나도 나섰다. 몇 해 전인 1979년, 최초의 "연방대법원 비사"로 부제가 붙은「더 브레더런 (The Brethren)」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6)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이 명확치 않은 채 사람들의 뒷이야기가 따랐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버거 원장에 대해 가장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원장으로서나 개인적으로나 버거는 언론의 취재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다고 했다. 그 책에는 만년의 더글라스가 버거에게 냉소와 경멸로 일관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이때 나는 더글라스의 자서전 2권을 읽고 소년적인 감동에 벅차 있었다. 자서전에 담긴 내용의 진위를 따질 만큼 미국사회에 대한 실력도 안목도 없었다. 버거 원장에게 더글라스에 관련된 질문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으나 예의가 아닌 성 싶어 참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대법원 판사가 헌법의 해석에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고 물었다. "Yes, or No." 개별 판사가 선택할 일이라는 것이다. 버거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원장다운 모범답안이다. 외모도 언행도 원장다웠다. 회합이 끝나고 즉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느 틈엔가 모두가 원장 주변에 늘어섰다. 내가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임기응변으로 뒤쪽에 있던 의자 위에 올라섰다. 결과적으로 버거 원장보다 내 머리가 훨씬 높게 사진이 찍혔다. 후일 사진을 나누어 주던 직원이 날보고 '수퍼 치프'7)이라며 농담을 했다.

마침 그 시기에 친구 박용일변호사가 워싱턴에 와 있었다. 미 국무성 장학금으로 상원, 하원 각각 6개월씩 외국인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일의 주선으로 하와이 출신 아카카 하원의원과 담소했다.8)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수도 워싱턴의 변호사가 되었다.9) 변호사 선서에 이어 몇 주에 걸쳐 여유롭게 워싱턴을 탐방했다. 마치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장면들을 재현하는 기분이 들었다.10) 그동안 나는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갤로웨이 교수의 지도로 체계적인 대법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학 중에 갤로웨이의 책, 「법은 누구편인가」 를 번역한 이유도 더글라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11) 갤로웨이는 오하이오주 우스터 (Wooster)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에 나섰다. 더글라스처럼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통합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워싱턴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더글라스에 대해 물었다.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위대한 사람일지는 모르나 별로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고 했다. 마지막 부인, 캐시 헤퍼넌 더글라스와 두 차례 의례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브레넌 대법관에게 편지를 써서 주소를 얻었었다. 한국 청년 법률가가 남편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실을 고마워한다는 타이프로 친 짧은 편지였다.

그의 무덤이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도 찾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Eternal Flame)이 밝히는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묘소 근처였다. 그때 이미 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케네디의 인기는 여전했다. 더글라스의 무덤은 소략했다. 누군가가 남긴 시든 꽃다발이 처연했다. 묘석의 앞면에 '이등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뜻밖이었다.

줄을 서서 연방대법원의 구두변론을 방청했다. 열 차례 가까이 시도했으나 절반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선착순 175명 중에 들지 못한 것이다. 법정에는 연방대법원변호사협회의 회원들을 위한 좌석이 별도로 할애되어 있다. 어느 주에서라도 변호사 경력이 3년 넘으면 협회에 가입신청서를 낼 수 있다. 갤로웨이 교수는 안식연구년 동안 대법원에서 변론이 열린 사건을 모두 방청한 기록을 남겼다.

대법원 건물 지척에 폴저스 (Folgers) 셰익스피어 도서관이 있었다. 뜻밖의 발견이다. 대법원건물보다 몇 년 먼저 건축되었다. 이따금씩 대법관들이 퇴근길에 들린다고 했다. 브레넌과 오코너가 단골이라고 했다. 1993년 통계로 미국법원의 판결에 셰익스피어가 인용된 회수가 800회가 넘었다.12) 나도 즉시 회원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회비를 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이날에 이르기까지 전자우편으로 소식을 접하고 있다.

2011년 3월, 마침내 야키마와 왈라왈라를 찾았다. 1987년 초 귀국하기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야키마 밸리 박물관에 들렸다. 더글라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크지 않았다. '더글라스 기념 코너'는 옹색하리만치 소략했다. 그나마 1998년 그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확장한 것이다. 이전 16년 동안 몇 점의 초라한 유품으로 근근이 버티었다고 한다. 대법관 시절의 서재를 옮겨 놓았고 벽면에는 그의 생애를 대변하는 각종 사진과 어록이 붙어있다. 부인 네 사람의 간략한 이력도 사진 옆에 적혀 있다. "극도로 분망한 공적 생활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정에 대해 소홀한 한 것이 (여러 차례 결혼한) 원인의 일부가 되었다.'라는 변명이 어쩐지 궁색하게 느껴졌다. 인디언 추장의 어록이 대형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 "그는 사랑하기보다는 찬양할 인물이었다." 13)

일본인의 정주 역사가 성의 있게 정리되어 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계 시민을 분리 수용한 역사적 사건이다. 더글라스 자신도 판결에서 정부의 편을 들고 나중에 솔직히 잘못을 인정했다. 기념품 가게에도 일본인형을 위시하여 하이쿠(俳句)를 담은 조악한 일본풍의 소품들이 주인공 석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의 행적도 있다. 다소 생뚱맞은 놋쇠 불상이 있다. 야키마 최초의 중국음식점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문득 더글라스의 자서전 구절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자신 못지않게 우수했던 중국계 여학생이 교사는커녕 어떤 사무직도 구하지 못하고 부모가 경영하는 식당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며 연민의 정을 표했었다.

노스 피프스 애비뉴 111번지, 어머니 쥴리아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으로 구입한 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더글라스가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다. 그가 다녔던 컬럼비아 초등학교 자리에는 컬럼비아 은행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궁색한 단독개업 변호사 사무실과 비교적 규모가 큰 합동법률사무소가 서로 지척에 있다. 대형 수퍼, 세이프 웨이(Safe Way)도 들어섰다. 더글라스 시절처럼 철도를 기준으로 한 '갑'지구, '을'지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야키마 상류사회는 도심에서 물러나 교외로 이주한지 오래다. 이 도시의 중심대로 야키마 애비뉴에 선 작은 중국식당에서 뷰페 점심을 들었다. 근래 타이완에서 이민 온 주인이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며 반긴다. 한국 드라마를 즐긴다는 안주인도 내 피부색에 친근감이 드는 모양이다.

더글라스가 학생과 선생으로 다닌 노스 야키마 하이스쿨은 더글라스 당시의 교장(초대)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스(A. C. Davis)하이스쿨로 개명하여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식당에서 길을 묻자 젊은 아들이 구글 지도를 찾아 보여준다. 새 건물이다. 해마다 '더글라스 에세이' 작문대회가 열린다. 사방으로 시야가 툭 터진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더 없이 자랑스러운 동창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얼핏 보면 풍찬노숙에 늙고 지친 모습이다. 동상 뒤로 넓은 들 멀리 일직선으로 아담스 산의 위용이 다가온다. 아버지를 잃은 여섯 살 소년의 새 아버지가 되었다는 바로 그 산이다. 동상 뒤에 건축된 낮은 시멘트 담장에는 그의 얼굴과 함께 기념문구가 새겨져 있다.

야키마 기차역 위로 고가도로가 생겼다. 밸리는 4계절이 분명한 곳이다. 과일농사는 여전하다. 아직도 멕시코 계절노동자가 온다고 한다. 사과, 포도, 베리 등 농장을 운영하는 한국 사람도 더러 있다. 인근의 야키마국(國)문화센터 (Yakima Nation Cultural Center)를 찾았다. 더글라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점원에게 연유를 물었다. 잘 모르지만 인디언을 사랑했던 판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31자 Yakima Nation Review (1970 창간)에 실린 대로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직면한 인디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세삼 처연하다.

더글라스의 별장 언덕위의 집, '구스 프레리'를 직접 들리지 못한 것이 못내 유감이다. 4월 말이나 되어야 자동차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아직도 겨울철에는 도보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휘트먼 칼리지가 있는 왈라왈라에 이르는 길은 예상보다 평탄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 덕분일 것이다. 더글라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휘트먼은 인문학 중심의 작은 학교다. 현재도 전체 학생 수가 천 사오백 명에 불과하다. 그리스학과 중국학이 새로 설치된 것은 학교 전통의 부활일 것이다. 더글라스 학생시절 교장(Penrose)의 이름을 딴 도서관에 들렸다. 잘 정돈된 인상이다. 더글라스의 이름을 딴 건물(Douglas Residence)은 방문 교직원용 숙소로 사용한다. 더글라스가 점원으로 일하던 팔켄버거 (Falkenberg) 보석상은 아직도 메인스트리트 그 자리에 있다. 이 작은 도시의 명물인 상점 시계탑은 하루 세 차례 청아한 공명을 울려 보행자의 눈길과 발길을 묶는다. 점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 나라의 중늙은이가 거의 한 세기 전 청년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게 몹시 신기한 모양이다. 인근 피자집에서 늦은 회한과 후회, 두 조각을 씹었다. 길잡이에 나선 시인은 더글라스는 이 맛을 몰랐을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그의 시구에 40년 객수산록(客愁散錄)을 부친다. 이제 끝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내 청춘의 되새김

아프다

슬프다

껴안으면 더욱

안개에 싸인 새벽

시간을 사막에 묻으면

먹고 자는 애벌레

꿈을 꾼다

훨훨 나는


_____________________

1) 안경환, "나의 스승, 김성식 선생님" 〈월간조선〉 1986. 2.

2) 안경환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 윌리암 다글라스 판사의 법사상」 (고시계, 1986) (서문 1986. 7.15).이 책의 출간에는 대학시절 절친했던 고 김상철 변호사(1947-2012)의 격려와 도움이 컸다. 앞서 펴낸 나의 첫 번째 번역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Russell W. Galloway Jr. The Rich and the Poor In Supreme Court History (1983); 안경환 역 「법은 누구편인가」 (고시계, 1985). 그는 현행헌법에 헌법재판소 규정이 도입되도록 기여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함께 나눈 그 시절 추억을 담아 옛 친우의 명복을 빈다.

3) 후일 알게 된 Donald Polden 학장은 1970년 더글라스의 탄핵을 주도했던 공화당 하원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험을 포함하여 더글라스 만년의 워싱턴 정가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4) Tom Ginsburg, Legal Reform In Korea (Routledge Publishing, 2004).

5)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고, 그 위기는 내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분들에게 누를 끼쳤다.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방황과 새로운 모색의 과정에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가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사성, 노영욱, 신우영, 세 친구의 각별한 우정이 큰 위안이 되었다. 이사성은 1987년 11월 KAL기 폭파사고에 희생되었다. "그가 떠나간 뒤로는 말을 해야만 뜻을 전할 수 있는 답답한 세상이 되었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근년에 작고하신 토마스 황 선생님께서 주신 인도와 격려는 나의 은밀한 행운이었다.

6) 대법관들은 판결문에서 서로를 '형제'(brother)로 부르는 전통에 착안한 제목이다. 당시까지는 여성 대법관이 한 사람도 없었다. 최소의 여성대법관 샌드라 오코너는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

7) (Super Chief.) 이 말은 버거의 전임자로 진보사법의 수장으로 지도력을 보인 얼 워렌 원장의 별명이기도 했다.

8) Daniel Kahikina Akaka(李硕)(1924- ) 아메리카 인디언과 중국인의 혼혈로 민주당 연방하원의원 (1976- 1990)을 거쳐 상원의원(1990- 2013)으로 재직했다. 용일은 후일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사무실에 배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케네디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9) 수도 워싱턴의 정식 명칭은 컬럼비아 특별구 (District of Columbia)로 50개 주와는 별도로 연방법에 의해 창설된 행정단위다.

10) 〈 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7). 이 영화는 1989년 미 의회가 역사상 최초로 선정한 미국의 '필름문화재' 25편 중 하나다. 안경환, 「이카루스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날다」(효형출판, 2001) pp.10-24.

11) Russell W. Galloway Jr., The Rich and the Poor in Supreme Court History (1983, 1992) 안경환 역, 「 법은 누구편인가」 (고시계, 1995;개정판 교육과학사, 1993)

12) 안경환,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13) "He was easier to admire than t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