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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6일 09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07일 14시 12분 KST

여성혐오(misogyny) 번역 논쟁의 본질은 번역이 아니다

Tim Wimborne / Reuters

여성혐오란 낱말은 어느새 널리 퍼졌다. 널리 퍼진 만큼 저항과 반론도 꾸준하다. 여성혐오의 원어는 'misogyny'다. misogyny는 어떤 감정양태를 넘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태도와 사회적 구조화를 내포하는데, 미움과 거리낌이 극단화된 상태 '혐오'로 번역하는 게 옳으냐는 거다.


여성혐오라는 비판에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여자를 혐오한다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여성혐오가 적당한 번역어가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우에노 치즈코는 저 유명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misogyny가 번역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라 인정하며 더 쉬운 표현으로 '여성 멸시'를 제시한다. 멸시도 혐오와 똑같은 약점을 가진다. 여성혐오라는 비판에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여자를 혐오한다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허다한데, "난 여성을 멸시하지 않고 사랑해. 멸시란 말은 극단적이야." 같은 변명을 봉쇄할 수 있을까? '성차별'이란 개념도 대안이 되지 않는다. 성차별은 어떤 성별에 대한 배제가 제도화된 상태를 이른다. 여성을 지렛대로 써야 성적 주체화를 이룰 수 있기에 여성을 갈망하는 한편 증오하는 misogyny의 미시적 양태를 설명할 수 없다.

'misogyny'를 '미소지니'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misogyny의 다면적 의미에 정확히 대응하는 한국어가 없으니 원어를 음차하여 중립적으로 재현하자는 것이다. 외국어를 음차하여 번역하는 사례는 많다. 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혐오란 낱말의 개념적 의미와 일상적 의미의 차이 때문에 대중적 소통에 오해를 초래한다고 보는 것 같다. 합리적 의견이지만, misogyny는 의미가 짐작되지 않을 만큼 낯선 외국어다. misogyny가 뜻하는 바, 그러니까 여성혐오 또한 한국사회에 낯선 개념이다. 여성혐오 대신 미소지니를 쓴다면 개념의 정확한 재현에선 장점이 있겠지만, 단어의 직관성이 현저히 부족하므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지체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선 여성혐오 보다 미소지니가 훨씬 비대중적인 번역어다.


여성혐오란 번역어의 선명함과 직관성은 논란을 불사르며 여성 의제를 급속히 전파했다.


여성혐오란 번역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직역에 가깝다. misogyny는 "싫어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misein"과 여성을 의미하는 "gyne"에서 태어났다. 한국어로 쓰이는 개념어 절대다수가 외래하였고, 비슷한 대응관계에 있는 한국어 낱말을 원래의 뜻과 다른 뜻으로 고정시켜 사용하며 번역됐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다. 대학 전공 교재에 실린 무수한 개념어도 그 낱말 자체의 뜻을 넘어 학습을 해야 이해할 수 있다. 혐오는 여성의제에 국한된 게 아니라 소수자 의제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므로 개념의 호환성을 생각해도 여성혐오란 번역어는 장점이 있다. 다만, 혐오라는 기표에 실린 적대의 뉘앙스가 낭자하므로, 악의를 품지 않은 성적 대상화의 경우, 기의와 서로 밀어낸다는 약점은 분명 있다. 이건 번역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misogyny가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 심리적 차원과 구조적 차원,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너무 크면서 촘촘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구에도 misogyny와 sexism(성차별)을 구분하자는 주장이 있다. misogyny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일컫는 어원을 갖고 있으므로 거기 맞춰 뜻을 좁혀 쓰자는 말이다. 한국에서 제기되는 비판과 똑같은 취지다. 번역을 넘어 개념 자체가 현실을 유효하게 말해주는가,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알리는 것이 사회에 도움되는가란 물음으로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misogyny는 정말 짧은 시간에 사회의 중심 의제로 부상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 통념과 기득권의 반발이 거셌고, 여성혐오를 낙인으로 쓴다며 운동 방식이 극단적이라 비판받기도 했지만, 이 모든 잡음은 부작용인 한편 순기능이다. misogyny는 은폐된 의제였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관습은 단군 조선 이래 수천년간 실존했음에도 멀리 잡아도 90년대까지 사회 문제로 대접받지 못했다. 메갈리아ᆞ미러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최대 성과는 misogyny를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날 것의 정치적 갈등축으로 부상시키며 가시화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란 번역어의 선명함과 직관성은 논란을 불사르며 여성 의제를 급속히 전파했다. 더 원만하고 중재적인 표현으론 이게 안 된다. 단순한 논란을 넘어 의제의 심화도 일어났다. 가령 여성혐오란 번역어를 채택했기에 misogyny의 적확한 번역어는 무엇이며 그에 앞서 misogyny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세부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나무위키와 남초 커뮤니티에서조차 '미소지니'가 상용어가 된 것은 여성혐오란 낱말의 힘이다.


왜 어떤 이들은 여성혐오란 표현으로 가리키는 현실을 성찰하는 대신 그 표현의 적확함에 매달리는가?


선명성과 비타협이 운동의 절대적 미덕은 아니다. 서구의 역사에서도 진보적 운동은 급진파와 온건파가 바통을 주고받으며 수행됐다. 운동 노선은 정세의 변화와 구조적 환경, 대중 인식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여성혐오란 번역어는 '다음'을 고민할 수 있는 계단을 쌓아준 것으로 쓸모를 증명했다. 나는 총론에선 여성혐오란 표현을 고수하되, '성적 대상화' 및 '성차별' 같은 개념을 각론에서 쓰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는데, 여성혐오를 미소지니로 대체하잔 의견에도 동의한다. 여성혐오란 큰 개념을 잘못 다뤄온 관행이 있다면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성혐오가 잘못 채택된 번역어라거나, 처음부터 미소지니를 썼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소급하는 것엔 반대한다. 그것은 지금껏 이어진 반-misogyny 운동 노선과 그 성과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기반을 둔다. 이 문제를 '번역'의 차원으로 다루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여성혐오'란 낱말을 사용한 이들의 전략적 선택에서 오류를 찾는 것으로, 그 낱말이 가리키는 문제의 다양한 주체와 책임과 층위와 심급을 환원할 수 있다. 왜 어떤 이들은 여성혐오란 표현으로 가리키는 현실을 성찰하는 대신 그 표현의 적확함에 매달리는가? 소통과 합의는 말하는 이들뿐 아니라 말을 듣는 자들의 몫이기도 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