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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25일 06시 0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25일 14시 12분 KST

마키아벨리와 샌델, 한국 정치의 재구축

연합뉴스

글 | 한면희(성균관대 초빙교수,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

안철수박사가 2012년 대선 이후 새정치를 위한 정당 활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정치학자인 고려대 최장집교수가 그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도록 선물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전해진 적이 있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서 2013년에 최장집교수는 안철수 신당 준비를 위한 싱크탱크 「내일」의 이사장직을 맡았다가 취임 3개월 만에 사임함으로써 또 다시 뉴스로 회자되기도 했다.

지금의 안철수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민주당과 합당 후 결별을 하고 신당인 국민의당을 창당하여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국민의 관심은 안철수의 새정치가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안철수의 새정치가 제3지평에서 대두하게 된 데는 기존의 주류 여야인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이 적대적 공생정치의 구도에 안주함으로써 국민에게 정치적 피로감을 가중시키면서 국사를 표류시킨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런 관계에 견주어서 그의 새정치는 물론 한국 정치의 미래를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16세기 초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경험을 통해 주목받을 만한 저술을 남겼는데,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과 술책은 최장집교수의 추천에서 보듯이 세계와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깊숙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과거 화려했던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열망 속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통일 이탈리아를 향한 공화국의 건설을 꿈꾸면서 그 실현 수단으로 권력은 군주(또는 통치자)에게 효과적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통치자가 국민 전체의 이익을 결과적 성취로 보여줄 필요가 있으며 지속적 통치와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변덕스러운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지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치는 학문이나 종교처럼 진리나 도덕의 내적 본질에 놓이기보다는 권력을 펼치는 외형적 이미지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여우의 간계로 기만과 위장을 행하고 필요할 때 과감하게 정적을 제거하는 등 사자의 용맹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통치자의 덕목은 국가를 위한 것이기만 하면 도덕적 덕목에서 멀수록 좋다고 여긴 것이다.

이제 우리의 정치행태를 마키아벨리즘의 거울에 비추어보도록 하자. 먼저 박근혜정부는 그 충실한 추종자라고 여겨진다. 일단 국민과 청년을 위한 정부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진보의 아이콘인 사회개혁도 수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풍기고 있다. 필자는 실제로 그렇게 해내기를 고대하는데, 염려가 되는 것은 왜일까?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를 천명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전도사격인 김종인위원장을 외면하였고 그야말로 선별하여 복지를 찔끔찔끔 펼치고 있는데, 진영 내부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외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과감하게 도려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충직한 추종자들에게는 언어적 마술을 동원하여 진실한 정치인들이라고 포장하고 있으니 어찌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미지 정치는 단기 효과를 낼뿐 끝내는 좌절되고 마는 것이 운명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구심은 최장집교수가 왜 새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안철수에게 마키아벨리를 읽도록 권유를 했는가에 미치게 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순진한 정치 초년생이 대권을 향해 나아가려면 마키아벨리가 겪었던 당대의 정치적 경험에 유념하라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최근 들어 안철수 역시 마키아벨리즘의 부정적 양태를 닮아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국민을 위한 새정치를 외형적 이미지로 풍기고 있을 뿐 실제로 이를 구현할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자가 되는 길로 들어서고자 호남의 지역정치에 슬쩍 편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는 당의 혁신을 위해 호남의 기득권 정치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안철수는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세력의 호가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다지는 행보를 취하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구태정치의 늪에 발을 깊숙이 담그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애처로움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희망을 본 국민 때문이다. 반면 야권의 대권 경쟁자였던 문재인은 당의 부정적 유산인 호남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애매모호한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을 대표로 영입함으로써 쇄신을 일거에 단행하였다. 물론 문재인도 여전히 친노운동권 정치인의 패권주의에 업혀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는데, 바로 이점은 안철수가 구태정치라고 지목한 바로 그것이다.

국민의 시각에서는 그럴싸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누구냐는 것보다는 누가되었든 통치의 반열에 올라섰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실제 관심이 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군웅할거의 패권 다툼이나 중세의 타락한 종교정치가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사태가 최악으로 흘러가는 것을 차단하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국가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여우의 간계도 적극 권장하는 정치책략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구태정치의 표본일 뿐이다. 최악은 마땅히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차악次惡에 머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회를 더욱 밝고 희망찬 곳으로 인도하려면 새로운 정치사상이 필요하다. 이럴 때 <정의란 무엇인가>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을 주목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하버드대의 정치철학자 샌델은 미국 사회의 최대 문제가 파편화된 개인주의, 특히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서 연유하는데, 이로써 사회경제 지평에서 온갖 해악이 초래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사기업이나 개인이 시장자유주의의 제도적 후원 속에 자신들의 이익을 적극 도모하는 일에 골몰하게 된 결과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초래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샌델은 갈수록 나빠지는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공동선common goods을 정치적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때 도덕적 공동선은 전체의 물질적 공익公益과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와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인간이 선악의 양면성을 띤 존재이므로 탐욕의 이기적 행위를 제지할 수는 없어도 위축시킬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선행이 갈수록 증폭되도록 정치와 제도로 성원할 때 비로소 공동선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국민을 변덕스럽다고 간주하여 이를 공포와 위압감으로 통제하려는 마키아벨리보다 국민의 선행과 정직, 형제애에 대해 신뢰와 갈채를 보내고 이를 적극 북돋는 샌델과 필자의 견해가 21세기의 정치에 맞는다고 본다. 근대화의 여명을 뚫고 올라선 한국 사회가 이제는 최선을 지향하는 차선次善의 지평에 이를 때가 되었고, 이를 위해서 정치가 전면적으로 새롭게 재구축되는 계기를 맞이하기를 고대한다. 새정치는 인물이 아니라 희망을 품은 정치적 가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글 | 한면희

현재 성균관대 초빙교수와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과거 생태철학자로서 대안적인 녹색대학의 대표(교수)와 한국환경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록문명론>과 <미래세대와 생태윤리>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환경정의연구소 소장으로 아토피 자녀의 어머니들과 교류하면서 갖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생태의학의 지평을 여는 데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치철학자로서 <제3정치 콘서트>를 출간하는 등 공동선과 사랑의 정치를 본원적으로 실현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