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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07일 11시 3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08일 14시 12분 KST

기본소득의 정치철학

StockFinland via Getty Images

글 | 한면희(성균관대 초빙교수,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

정치권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앞으로 진지하게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대선 후보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소박한 형태로나마 기본소득의 도입을 공약으로 천명하였고, 이에 맞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국민은 공짜밥을 원하지 않는다"는 일갈로 이를 포퓰리즘 정책으로 몰아붙이면서 더욱 이목을 끈 바 있다. 또한 정운찬 전 총리와 박원순 서울시장도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한 바 있으므로 장차 큰 쟁점으로 부상할 조짐이다.

기본소득이 우리에게 주목을 받게 된 직접적 계기는 작년 6월 스위스에서 전 국민에게 월 2,500스위스프랑(약 29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자는 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진 데서 비롯된다. 또한 중도우파 성격의 핀란드 정부가 미래를 가늠하는 실험적 차원에서 금년 1월부터 2년에 걸쳐 실업급여 대상자인 2,000명을 표본으로 월 560유로(약 7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을 시행함으로써 향후 세계적 이목을 끌 것으로 전망된다.

기본소득은 정부가 보편적으로 국민 누구에게나 각 개인에게 일정한 현금을 정기적으로 무조건 지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드러난 뜻만으로는 보편적 복지의 일환으로 여겨져서 진보적 정치철학에 따른 것으로 비춰진다. 그런데 핀란드의 좌파인 노동조합과 사민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된 이유는 그동안 누리고 있던 보편적 복지정책의 시혜가 대폭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본소득의 주요 주창자들이 보수주의 정치 사상가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자유지상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을 꼽을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먼은 국가가 보편적 사회복지를 구현하고자 세금을 많이 징수하거나,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거나 또는 정년을 정하여 기업에 권고하는 등의 정책이 모두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왜일까? 간단하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누구라도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허용할 터인데, 기본소득은 자유를 위한 최소의 물질적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21세기는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는 시대이다. 일단 사회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됨으로써 두터워진 저소득층이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4차 산업혁명 가운데서도 AI(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이 두드러질 것인데, 이로써 육체노동은 물론 정신노동까지 포함하여 전통적 노동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될 사태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기술은 로봇과 컨베이어 시스템, 정보화산업 등의 발전을 통해 육체노동의 영역을 잠식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 늘 새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이런 것은 정신의 기술적 고도화에 따른 활용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AI는 기술의 주체로 기능하던 정신적 지능을 빼어나게 모방하거나 능가함으로써 오히려 객이 주인이 되는 기술상의 상전벽해를 일구어내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결국 AI의 도래는 자동차 조립에서 법률적 판결, 더 나아가 의학적 진단까지 망라하게 되는 까닭에 양적으로 20세기 노동의 99%를 소멸시킬 것이다.

AI 비관론에 따를 경우, 생산수단 경영과 플랫폼 운영 등의 소수 일자리만 남게 된다. 이와 대립되는 낙관론은 근거가 취약하다. 신중한 탈비관론의 입장에 서있는 필자는 끊임없이 틈새의 창의적 지평을 여는 새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그런 유형의 일자리가 만들어져도 매우 지성적이거나 감성적이어서 많은 몫이 못 될뿐더러, 그것마저 계속 잠식당하는 위협에 내몰리기 때문에 과거와 비교할 때 그 양이 몹시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이다. 적지 않은 국민이 생산노동서 소외되는 무소득 사태를 맞이할 것인데, 주요 돌파구는 기본소득에 따른 소비적 문화산업의 육성과 그 일자리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AI 시대는 기본소득을 필수적으로 요청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정치사상이 태동되는 근간으로서 기본소득의 수용 여부와 결부된다. 서유럽의 보수정치는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전통을 고수하는 지향을 갖는데, 인간을 독립적 자아의 상으로 조망하여 무엇이든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성하고자 한다. 진보정치는 마르크스적 평등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협력적 노동에 종사하는 연계적 자아의 상으로 인간을 조망하지만, 계급이 사라지거나 엷어진 목표 지향적 사회를 구현하는 까닭에 자유가 유린되기 쉬운 전체주의로 미끄럼을 타기 일쑤였다.

20세기 말에 태동한 새 정치철학의 조류는 현대 공동체주의로서 필자는 자유적 공동체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필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고유한 자아의 자유로운 실현에 경주하면서 그것이 연계된 가족과 이웃,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미덕어린 영향을 끼쳐 사회의 공동선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제3의 정치사상으로 우파와 다른 점은 인간을 독립적 자아가 아닌 연계적 존재로 본다는 것이고, 좌파와 다른 바는 자유의 계기를 적극 포함함으로써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유형의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조망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 사조인 우파 보수주의는 두 부류로 대별할 수 있다. 닫힌 보수주의는 보편적 복지정책 자체를 불허하는 견지에서 보편성을 띤 기본소득도 거부할 것인데, 한국의 보수정치는 이 선상에 놓여 있다고 판단된다. 다른 유형인 열린 도덕적 자유주의는 보편적 복지를 거부할지언정 최소한의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난한 자에게 자유의 최소 물질적 조건으로 기능하리라고 보아 허용할 것이다.

두 번째 사조인 진보적 평등주의는 마르크스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보편적 복지정책을 선호하여 이를 강화하자는 입장이므로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만일 기본소득을 수용할 경우에는 보편적 복지를 대체할 만큼 확장된 것을 추구할 것이다.

문제는 전통적인 좌우의 정치철학이 기본소득의 복지정책에 커다란 한계를 보인다는 점이다. 닫힌 보수주의가 갖는 치명적 약점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혜택에 마지못해 동조하지만 선별해서 시혜를 주는 방식으로 다가가고, 그것조차도 최소화하려고 함으로써 인색함과 몰인정을 드러내게 된다. 진보의 경우 확장된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침으로써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베짱이 유형의 인간을 양산하는 복지병과 재원고갈에 따른 재정파탄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필자는 닫힌 보수주의와 보편적 복지 만능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지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지평이 적정한 기본소득 정책이고, 이것을 정당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정치철학이 자유적 공동체주의라고 본다.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기본소득의 적정성을 다음의 두 원칙에 따라 구현하고자 한다. 첫째, 기본소득을 공동선의 구현으로 간주하여 인간이면 누구나 최소한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설정한다. 보수의 도덕적 자유주의는 기본소득을 권리로 간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너무 강한 것이어서 닫힌 보수주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는 문제를 갖는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을 받게 될 사회적 약자가 자산 창출에 많은 기여를 하는 사람들에게 무언으로나마 "내가 너희로부터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내는 메시지는 온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는 개개인의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선 구현의 지평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즉, 각 자아가 연계된 사회 구성원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데 따른 행위의 일환이다. 연계적 자아관에 따른 공동체주의가 독립적 자아관에 따른 도덕적 자유주의보다 적합한 것임은 분명하다.

둘째, 기본소득은 노동 능력을 갖추고 있는 한에서 일할 의지를 갖도록 유인하는 최저 선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보편적 복지의 확장을 주창하는 평등주의자들은 인도주의에 부합한다는 강점을 갖지만 일할 의지를 상실케 한다는 결정적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넉넉한 물질적 여건 속에서 편안히 놀고먹는 사람과 소박하더라도 일을 통해 자아 성취의 보람과 더불어 사회적 존재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비교한다면 답은 분명해진다.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평등주의나 심지어 애매한 공화주의와 달리 고유한 자아의 자유로운 노동실현을 중시하기 때문에 복지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강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기본소득은 필요하다. 더군다나 AI 시대에 접어들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스위스의 경우처럼 너무 과도하여 포퓰리즘의 성격을 띤 것일 때는 곤란하다. 이때 주목할 수 있는 방안은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다. 핀란드는 2015년에 실업률 9.4%를 기록할 정도로 서유럽서 매우 높은 수준에 처해 있고, 이것이 1990년대부터 장기적으로 이어옴으로써 기존 사회복지에 따른 부담이 재정 건전성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는 형세다. 이에 핀란드는 기존 복지체제를 다소 완화하더라도 재정 건전성을 도모하고, 노동회피에 따른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율을 높이면서도 누구나 빈곤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기획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핀란드 모형을 참조하여 기본소득을 신중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우 핀란드의 강한 복지와 달리 약한 편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고려해야 할 다른 조건은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우리는 선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복잡다단한 복지정책을 일차의 기본소득으로 환원하여 대체하고, 이차로 노동능력을 결여한 아동과 노년층,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아동보육과 의료복지 등 추가적인 복지정책을 시행하여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 요청된다. 특히 기본소득은 시행의 단순함으로 인해 관료화 함정, 즉 복지 시행의 이름 아래 관료를 잔뜩 늘려 소중한 예산을 방만 운영하는 낭비의 덫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강점이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대안으로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 이 칼럼은 nsp통신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글 | 한면희

현재 성균관대 초빙교수와 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과거 생태철학자로서 대안적인 녹색대학의 대표(교수)와 한국환경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록문명론>과 <미래세대와 생태윤리>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환경정의연구소 소장으로 아토피 자녀의 어머니들과 교류하면서 갖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생태의학의 지평을 여는 데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치철학자로서 <제3정치 콘서트>를 출간하는 등 공동선과 사랑의 정치를 본원적으로 실현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