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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4일 12시 1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4일 14시 12분 KST

디스패치 내용증명의 추억

gettyimagesbank

어느 겨울 아침, 회사에 내용증명 1장이 날아왔다.

-<사진저작물 저작권침해 관련 확인의 건>

내용증명은 공문과 마찬가지의 물건이다.무척 격식 있고 무거워 보이지만 사실은 보낸 쪽의 주장과 의사를 그대로 쓴 문서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고, 어떠한 공신력도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이메일만큼의 무게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옛날, 문서가 가끔 도중에 사라지던 때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받는 쪽에서는 아주 성가신 물건이라는 점에서 또한 공문과 똑같다. 어쨌든 내용증명은 일종의 법적인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가볍게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날씨가 무척 추웠기 때문에 문서를 가져온 우편실 담당도, 받는 법무팀의 우리도 신경은 꽤나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내용증명 왔어요, 서명해주세요.""어디래요? 사진저작물 침해? 내가 그렇게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는데 또 어느 팀에서 쓴 건지 모르겠네요.""어디서 썼는진 모르겠고 어디서 왔는지는 여기 적혀있네요. 어디보자, 디스패치?""예? 디스패치요?"

디스패치.

연예계 기자들 중 베테랑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전문 연예 탐사보도 매체.이른바 전문 '파파라치' 미디어라고까지 불리는 그곳에서 우리 회사로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이다.

하지만 실로 황당한 상황인 것이, 우리는 콘텐츠 회사이기는 하지만 연예계와는 아주 무관한 곳이라 디스패치와 엮일 일이 하나도 없었다.그 얘기에 법무팀 변호사들과 팀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몰렸다.

"혹시 우리 직원 중에 스타랑 연애하는 친구가 있었나요?""그럼 내용증명을 보내겠어? 보도를 터뜨릴 일이지....... 이게 대체 뭔일이람?"

선임 변호사님이 객쩍은 농담을 일축하며 직접 내용증명의 봉투를 찢었다. 평소라면 심각한 사건이 아닌 한 그저 접수처리만 했을 일이다. 실은 진짜 심각한 케이스는 내용증명이 오지도 않는다.하지만 디스패치라는 이름이 선임변호사님을 직접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내용은 아주 간결했다.

<귀사의 익일번창을 기원합니다. 

(주)디스패치뉴스 그룹은 귀사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발송하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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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요약하면, 내용증명의 내용은 이러했다.

디스패치는 '탐사보도'를 통해 다수의 사진 저작물을 '창작'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신들이 홍보 목적으로 사용하는 블로그에서 디스패치가 찍은 사진 저작물 다수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해당 사진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표현'에 해당하는 저작물이므로 이는 명백한 저작권 침해 사항이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디스패치는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바이며,

본래 디스패치의 사진 1장에 대한 손해액은 2백만원에 달한다.

다만 귀사에서 스스로 불법행위를 중단하고 정해진 날짜까지 합의금의 조정을 요청한다면, 피해금액을 산정하여 조정이 가능하다. 

정해진 날짜까지 합의에 응하지 않는다면 민사상 손해배상 및 형사상 저작권법 위반죄 고소에 들어갈 예정이다.

1장당 2백만원.

내용증명을 보며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단가가 웬만한 유명 사진 작가 뺨치는 가격이군요."

"넌 그것 밖에 안 보이냐? 문서와 보내온 증거부터 봐야지. 어디 보자. 이거, 냄새가 나는데?"

"무슨 냄새요?"

"법률가의 냄새. 문서가 일반인이 만든 내용은 아니군."

선임 변호사님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이 문서는 일반적인 서식폼을 통해 만들어진 내용증명은 아니었다. 

내용증명은 보통 사람들이 안 써봐서 어렵고 무겁게 느껴질 뿐 결코 어려운 법률문서가 아니다. 웹을 조금만 뒤져도 금방 쓸 만한 서식을 찾아 구성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법률문서가 바로 내용증명이다.

하지만 디스패치에서 보내온 내용증명은 내용은 간결했지만 법적 책임을 거론하는 서두에서 증거와 합의 조건과 법적 경고로 마치는 마무리까지 쓰인 용어와 솜씨가 법률가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문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숙련된 법률가는 보면 안다.

"최소한 법대 출신의 법무팀원이나 법무사, 아니면 자문 변호사가 붙어서 만든 물건이야. 하지만 저작권 전문가는 아니군."

"예? 그건 왜죠?"

"왜냐하면 이른바 파파라치 사진은 저작권을 주장하기 아주 까다로운 물건이거든. 게다가 연예인은 보통 공인이라지만 초상권 문제도 짚어 봐야 되고. 그걸 이렇게 자신있게 주장하다니 법률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저작권 전문가는 아닌 거지."

애초에 어떤 창작물에 저작권이 인정되기 위한 요건은 다음과 같다.

1.창작성이 있을 것(Originality)

2.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

그런데 '사진'은 대체로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필름이나 디지털 파일에 복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성이 있고,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사진이란 대체 뭘까?

학설은 여러 논란이 있지만 한국 법원의 판례는 보통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촬영자가 촬영시간을 자유롭게 정하여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구도를 설정하거나 빛의 방향과 양, 카메라의 각도를 조절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창작적 노력 혹은 개성을 표현한 사진.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거야말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전형적인 문구가 아닐까?

어쨌든 이러한 설명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저작권법이 발달한 해외의 판결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법 중 하나다. 

그런데 이른바 '파파라치 사진', 그러니까 셀러브리티를 몰래 촬영한 사진은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찍기 위해서는 촬영자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데다, 단지 사실의 전달 수준을 넘어서 기획과 독창적인 의도가 있어야 가능하다.

반면 이런 사진은 촬영자가 어떤 개성을 들여 찍을 여지가 상당히 적다. 왜냐하면 '파파라치 사진'의 생명은 표현이 아니라 정확한 현장성의 전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스포츠 스타와 아나운서가 연애를 하는 사진을 찍는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를 놓치지 않고 추적하는 연예 탐사보도 사진 기자는 자신의 개성을 들여서 두 사람이 만나는 사진을 촬영해야 할까?

오히려 전문가라면 두 사람의 만남이 일어난 현장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실감나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찍지 않을까?

때문에 이 문제는 굉장히 까다로운 법적 논란을 품고 있다.

어쨌든, 디스패치는 1장 당 2백만원 내외의 합의금을 주지 않으면 우리에게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해온 상황이었다. 

만약 싸움을 시작한다면 저작권 업계에 상당히 회자될 만한 판례가 나올 게 분명하다. 

간만에 긴장되면서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일단 접수 처리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증거자료를 보아하니 오해하고 잘못 보낸 모양이군. 홍보팀과 현업에 1차 확인 거치고, 디스패치에게 전화해서 우리 쪽 블로그 아니라고 해."

"예?"

그때서야 법률적 용어로 장식된 문서의 뒷장에 '첨부문서'로 채증된 사진 증거가 붙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디스패치라는 이름과 법률 용어 장식에 현혹되어 정작 진짜 중요한 사실관계, 그러니까 증거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스패치가 제시한 증거는 간단했다.

연예인 기사를 다룬 개인 블로그에 우리 회사 콘텐츠도 실려 있었던 것이다.

즉, 디스패치가 보기에 해당 개인 블로그는 우리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였던 셈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만약 그렇다면 애초에 엔터테인먼트와 상관없는 우리 회사가 디스패치 사진을 이용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사 사용한다 해도 공식 블로그가 아닌 계약된 개인 블로그라면 우리 회사가 책임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아가 어떤 콘텐츠 회사도 공식 홍보 블로그를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섣불렀군요."

"네 판단 말이지?"

선임변호사님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나는 잠시 추운 회사를 뛰어다니며 홍보팀과 현업 담당자를 만나러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혹은 재미 없게도 디스패치의 사진을 우리 회사 쪽에서 이용한 사실은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디스패치 법무팀에 전화를 걸어 그런 사실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며 사안을 종결지었다.

내용증명까지 보내온 사안 치고는 싱겁게 끝나버린 케이스인 셈이다. 

콘텐츠 업계는 저작물을 이용해 콘텐츠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남의 저작물을 허락 범위를 넘어서 이용하다가 문제가 되는 사례는 굉장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재판까지 가는 경우는 의외로 드문데, 사전 합의로 끝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헤프닝으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종종 터지는 디스패치 보도를 보며 콘텐츠 업계에 종사하는 사내변으로서 가끔 생각에 잠길 때가 있었다.

과연 디스패치의 사진은 정말 저작권이 인정되는 사진이었을까?

만약 우리가 디스패치 사진을 이용한 상황을 가정했을 때, 재판까지 갔다면 우리와 디스패치 중 누가 이겼을까?

해답은 엉뚱하게도 디스패치의 특종이 아니라 낙종에서 나왔다.

디스패치가 보도하지 못하고 경쟁 매체가 보도한 셀러브리티 열애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방송사가 이를 인용 보도하면서 저작권 분쟁에 휘말려 재판까지 갔는데, 1심과 항소심 모두 동일하게 '연예 탐사 보도 사진'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1심 : 서울남부지방법원 2014. 4. 24. 선고 2013가단215014 판결, 항소심 서울남부지방법원 2014. 9. 5. 선고 2014나51591 판결[항소기각, 확정]).

이 판결에 대한 선임 변호사님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논란이 있겠는데?"

어쨌든 대법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지금의 법원의 태도에 따르면 디스패치의 사진은 쉽게 저작권이 인정되기 어려운 셈이다.

당분간 홍보팀에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같은 사안의 내용증명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P.S. 물론 그렇다고 모든 언론사의 사진이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을 리는 없으니 언론사의 사진 이용 시에는 주의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