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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23일 09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7월 23일 14시 12분 KST

사소한 삶에 죄책감 가지지 말자

회사 일이 삶의 전부인 부장님들 팀장님들, 임원이 된 선배들이 보기에 이런 내 삶의 관(觀)은 남자답지 못한 걸로 보일 수도, 비전이 없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나를 참 사소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사소하게 살고 싶다. 내 몫이 아닌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가지기 싫다. 청운의 꿈도 없고 부귀영화도 필요 없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회사에 기여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사소한 소비와 사소한 여가의 행복을 즐기며 살고 싶다. 출근은 하지만 출근하기를 계속 싫어하면서, 회사에 없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계속 고민하면서, 오순도순 내 깜냥대로 과장이나 거짓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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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더니 이제 내게 가장 가까운 빨간 날은 추석이다. 추석. 9월 말. 아직 벼를 베려면 두 달이 넘게 남았는데! 아, 앞으로 이 휴일 보릿고개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꾸준한 정신 수양을 통해 그 동안 자제 중이었던 '자기 전 내일 출근이 싫어 이불에 얼굴 묻고 비명 지르기'를 요즘에는 도저히 참기 힘들다.

이 놈의 출근은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굳이 요즘처럼 당장 눈 앞의 곶감이 없는 시기나, 출근 압박이 몇 배로 증폭되는 연휴 직후가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탈 때면 돌아올 수 없는 강에 발을 담그는 느낌이다. 출근을 하고 있는데 이미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순간에도 이미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아, 내 회사원으로서의 삶 자체가 아이러니구나.

[병가라도 내고 싶은 요즘, 출처 : 트위터 @sibauchi, @MrScottEddy]

사실 난 대학 때 지금 직장과 아무 관련 없는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심지어는 내가 "회사"라고 불릴 만한 데에 출퇴근을 하고 월급을 받으며 살 거라는 생각도 해보질 않았었다. 한때 난 당연히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거라 믿었었고, 그 다음 한때는 그냥 학교에서 평생 공부를 하며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대다수 평범한 한국인들이 그렇듯,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공부나 취미, 관심사나 능력과는 전혀 상관 없는 뜻밖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회사원이 되고 난 얼마 동안은, 완전히 새로운 문화와 구조에 익숙해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이등병 때 고참에게 미쳤냐? 돌았냐? 라는 갈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군대에 적응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일이었다. 일을 빠르게 배우기 위해 노력도 하고 선배들의 사고방식을 좇아가려고 했던 건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거나 조롱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얼마간에는, 이 직장 이 업계의 일에 흥미를 가져보려고 노력도 했다. 일과 관련된 공부가 뭐가 있을까 찾아도 보고(물론 찾아만 봤다), 일 잘한다는 선배들은 무슨 재미로 이 일을 하고 있을까도 들어보고, 그러다가 일과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집중을 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리 연차도 쌓여가고 있는 요즘 생각해보면, 역시 난 아무래도 이 회사를 즐기면서 다니기에는 글러먹은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일이 되는 순간 질리고 지친다는데, 처음부터 좋아한 적 없었던 이 업계의 일을 하면서 좋아하려고 노력해본들, 당최 보람이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 하지만 잠시 외면하려 노력했었던 사실을 얼마 전부터 그냥 마주하기로 했다. 그래, 난 내 회사 내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나를 스스로 인정하기 전에는, 진실을 마주하려 할 때마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죄책감 비슷한 희한한 무언가를 느꼈었다. 회사원이 자기 일 자기 회사를 사랑하지 않아? 이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 급이야! 라고 누군가 내게 돌을 던질 것만 같았다.

특히 회사에 있는 대학 동문 선배들을 만나 술이라도 한 잔 얻어먹다 보면, 기대 반 응원 반 압박 반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일상이다. 회사에서 이거 하면 딱 김게이 대리가 생각나도록 존재감이 생겨야 하지 않겠어? 좀 더 열정적으로 일하고 위에 어필도 최대한 잘 하고 그래야 앞으로 크게 되지! 맛있는 술 맛있는 안주 실컷 사주시면서 이런 애정 어린 이야기를 해 주는 선배님들이 참 고맙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아 네, 네 그래야죠, 하면서 영혼 없이 대답할 뿐이다. 솔직히, 난 그렇게 살기 싫은데.

회사에서 인정받고, 빠르게 승진하고, 연봉을 많이 받고 하는 것에 난 대단한 욕심이 없다. 아, 솔직히 연봉에는 조금 욕심이 있긴 있구나... 하지만 어쨌든 난 내 회사에서의 입신양명에 한 치의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일에 내 열정을 무리하게 쏟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러 학교로 돌아가거나,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방황할 용기도 없다. 아마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노동 인생의 평생을 적당한 월급쟁이 회사원으로 살 가능성이 아주 클 것이다. 내가 봐도 참 소심하기 그지없는 자본주의 저렙 노예의 화신 수준인데, 이런 내 삶을 난 부끄러워하지 않으련다.

회사 일이 삶의 전부인 부장님들 팀장님들, 임원이 된 선배들이 보기에 이런 내 삶의 관(觀)은 남자답지 못한 걸로 보일 수도, 비전이 없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나를 참 사소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사소하게 살고 싶다. 내 몫이 아닌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가지기 싫다. 청운의 꿈도 없고 부귀영화도 필요 없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회사에 기여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사소한 소비와 사소한 여가의 행복을 즐기며 살고 싶다. 출근은 하지만 출근하기를 계속 싫어하면서, 회사에 없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계속 고민하면서, 오순도순 내 깜냥대로 과장이나 거짓 없이.

나처럼 사소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회사 출근하기 싫다고 죄책감 가지지 말자. 야근하기 싫다고 죄책감 가지지 말자. 출근하자마자 점심 메뉴 고민한다고, 회사에서 허핑턴포스트 좀 본다고 죄책감 가지지 말자. 우리, 사소한 삶을 산다고 죄책감 가지지 말자.

(www.snulife.com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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